고향의 그림자 / 퇴허자
2021년 10월 31일(일) 19:24
퇴허자 광주대각사 주지 / 제주퇴허자명상원장
고향(故鄕)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몇 개가 있다. 추억(追憶)과 그리움, 포근함과 어머니의 품속 등이 그것이다. 명절 때마다 고향을 찾아 성묘도 하고 세배도 드리는 우리나라 세시풍습(歲時風習)을 서양인들은 무척도 부러워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요즘 이런 미풍양속이 차츰 쇠퇴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변화 발전해야 할 전통문화가 편의주의에 사무쳐 퇴락하는 일은 우리가 반드시 자성(自省)해야 할 일이다.

필자의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 85번지(본궁부락)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전학해 대부분의 학창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 전주 이(李)씨 집안의 첫 번째 손자로 태어난 필자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님께 특별한 효도를 하게 됐는데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고추(?)를 달고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필자의 부모님은 할머니의 크나큰 배려로 가까운 곳에 초가3간과 논 전답을 물려받고 분가의 쾌거를 이루었다. 곧 엄격한 어른들의 시집살이를 면책 받게 된 것인데 어머니를 대신하여 큰 어머니가 고모들과 함께 대가족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되었다.

당시 내 기억으로 우리 집은 궁궐 같은 집으로 대문은 솟을대문이요 담장은 기와 담, 위채와 아래채 그리고 행랑채, 곳간과 마구간 등 방들이 30여개가 넘었으며 위채는 마당보다 1m 이상 높은 터 위에 커다란 대청마루와 민화들이 방마다 붙어 있었고 한지로 발라진 문들은 곱게 접어 천정에 매달린 문고리에 걸리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마당 가운데 자리한 샘은 두레박 길이가 20m 쯤이나 될 만큼 깊어서 동네 아낙들이 모여들어 노닥거리는 놀이터였으며 행랑채도 큰방과 작은 방 두 칸이나 되어 밤마다 동네사람들의 화투와 마작, 윷놀이 등이 판을 쳤고 위채에서는 할아버지의 시조 꾼들이 매일 끊일 새가 없었다. 한 마디로 천석꾼 부잣집인데다 넘치는 인정과 퍼주기 좋아하는 할머니의 큰 손은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기억된다.

역시 사람은 이러한 정(情) 때문에 때로 생사(生死)가 갈릴 수도 있다. 할머니는 3남3녀를 두셨는데 그 중에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큰고모 다음으로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큰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는데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신 분으로 대한민국 상이용사 출신인 아버지와는 사상과 이념이 달랐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전라도 지역은 북한군이 2번을 지나친 곳이다. 한 번은 공격해 내려올 때였고 또 한 번은 후퇴할 때였는데 이 두 차례 과정을 겪으면서 할머니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로 곡간에 숨겼지만 동네 그 누구도 밀정노릇을 하지 않음으로써 두 아들을 위기에서 다 살릴 수 있었다. 평소 베풀고 산 덕택이었다.

필자는 할머니의 깊은 사랑과 후덕한 인정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귀여움 속에서 성장하였다. 나무도 성장할 때 거름을 많이 주면 큰 나무가 되듯이 베풀기 좋아하는 내 성격도 할머니의 후한 인정을 보고배운 것이 아닌가 한다.

할머니는 내게 늘 말씀하셨다. “너는 양반이 아니라 임금의 자손이니라. 그러므로 아무하고나 사귀지 말고 아무거나 먹고 아무데서나 잠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상스런 말을 입에 담지 말고 점잖게 행동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반드시 도와주어라.” 이렇게 신심당부 하셨다. 그리고 항상 “괜찮아!”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훗날 내가 쓴 산문집의 책 제목을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라고 명명했던 것도 이러한 할머니의 당부 말씀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러 큰 바위 얼굴 같았던 할머니도 가셨고 얼마 전 찾아갔던 고향마을에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기와집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콩밭으로 변해 있었다. 눈물이 아롱거려 차마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허전한 마음만 달래며 돌아왔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므로 집착을 놓아야 한다. 고향도 결국 한 낱 그림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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