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아스포라에게 귀를 기울이라 / 천세진 |
| 2021년 12월 13일(월) 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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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을 만든 감독은 미국에 사는 유대교 랍비에게 디아스포라의 정체를 묻는다. 랍비는 그 정체성을 ‘고통’이라고 답했다.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말한 고통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필자의 외가는 고향이 함경도이고, 친가는 강원도 이북 평강군이다. 양가의 뿌리가 모두 북쪽인데, 이제 북쪽의 고향을 기억하는 분은 없다. 전쟁을 피해 중국 흑룡강성에 정착하신 큰 고모님을 비롯해서 기억을 가진 양가 어른들 모두가 돌아가셨다. 필자도 실향 2.5세인 셈이다. 기억에도 없으면서 무엇을 느끼겠느냐고 말하겠지만, 찾아오는 이들도 없고 찾아갈 곳도 없다는 사실을 명절 때마다 절감했다. 살아오는 내내 고향이라는 개념은 얕게 내린 뿌리 같은 것이었고, 디아스포라 의식을 갖고 살 수밖에 없었다.
랍비는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정체를 ‘혁신’이라고 말했다. 그 또한 이해되었다. 토착민들에게는 잘 체감되지 않는 사소한 문화적 요소들조차 디아스포라들에게는 예리한 송곳처럼 파고든다. 디아스포라들이 토착 문화가 갖고 있는 장단점 모두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문화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공격적 성향을 갖고 있는데 외부를 향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토착 문화의 거부반응을 느낄 때마다 디아스포라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그 물음은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 디아스포라들이 힘겹게 자기 몫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토착민이 자리를 내주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쉽게 내주지 않는다. 혁신을 통해 문화적 풍토가 바뀌어야만 그나마 약간의 자리와 몫이 돌아온다. 혁신은 디아스포라들에게 절박한 삶의 통로다.
디아스포라를 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토착민들은 디아스포라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토착민은 기존의 문화를 고수하려 한다. 자신들의 문화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확인하려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문화 자체라고 믿기 때문이다. 좋은 것들로만 구성되면 좋겠지만, 어떤 문화도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다. 불합리한 요소들이 제거되어야만 사회가 발전하는데, 그 요소들을 잘 구분해내는 이들이 바로 디아스포라들이다.
12세기 사상가 생 빅토르 후고(1096-1141)는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아다. 좀 더 성숙한 사람은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는 코스모폴리탄이며, 궁극의 성숙한 사람은 모든 곳을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방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사유를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에 매어두지 말고 확장하라고 말한다. 공간적으로는 디아스포라가 아니더라도 사유만큼은 디아스포라처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문화가 정체되지 않고, 소수자나 혁신을 말하는 이들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된다.
토착문화를 지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문화는 뿌리가 있어야 단단하게 성장한다. 헤로니모 임이 한인회를 만들려고 했던 이유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나라마다 쫓겨난 망명자들은 자신의 인민들의 전위를 상징한다.”는 말을 새겨야 한다. 혁신을 주장하던 누군가가 그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나거나 함구를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그 공동체를 혁신할 사고를 가진 누군가를 쫓아내거나 귀를 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착 문화공동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디아스포라의 불편한 목소리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너는 토착이 아니고 주류가 아니다.”라고 무시해서는 희망이 없다. 디아스포라들과 소수자들은 문화공동체의 가장 약한 고리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니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정신적 전위들이고, 우리에게 혁신의 기회를 선물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