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작업실]남도예술 전통 맥 잇는 한국화가 남리 허임석 “평범한 순간 속 가슴 따뜻한 위로 전해지길” ‘온고지신’ 화두, 전통회화의 현대화 새로운 화업 구축 연륜 더한 절제미…우리네 일상 속 정겨운 풍경 담아내 진솔한 감각으로 재해석한 화폭마다 ‘사람 내음’ 물씬 글·사진=최명진 기자

2021년 12월 22일(수) 19:19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다. 고즈넉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나무 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찍는 데 골몰한 모습들이 퍽이나 정감있다. 곁에 찾아든 강아지와 닭도 친숙함을 더한다. 21세기 감각으로 재해석된 풍속화의 면모가 물씬 느껴진다.

올해로 예순한 살인 남리(南理) 허임석 작가는 진도 출신으로 광주 지역에서 4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화를 그려오고 있다.

동구 동명동 ‘남리 갤러리카페’에서 만난 허 작가는 1층 카페와 2층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들을 세세하게 소개해줬다. 따뜻함이 풍겨 나오는 그의 그림에는 우리네 사는 이야기들이 빼곡히 담겨있다.

허임석 작가의 작품 지향점은 전통회화의 현대화다.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한 한국적인 맛을 작품 세계로 표현해오고 있다.

“이곳은 2년 전 도시재생 사업에 동참하면서 열게 된 공간입니다. 누구나 찾아와 차를 마시고 그림을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해요. 이때까지 그려온 그림들을 쌓아두기보다는 전시해 사람들과 함께 소통해오고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 지향점은 전통회화의 현대화다.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 한국적인 맛을 그만의 작품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수묵의 선은 그대로 살리면서 그 위에 색깔을 입혀요. 실험적인 현대수묵을 해오고 있죠. 우리가 자연을 볼 때 왜곡해서 보지 않잖아요. 그런 것처럼 일상 속 풍경도 있는 그대로 보면 돼요. 최근 작업들은 인물화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그의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는 전통성을 잃지 않은 채 새로움에 대한 도전 의식으로 독특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도제식 교육을 통해 전통 산수 등 한국화의 기법을 익힌 작가는 전남대 예술대학 미술학과와 동국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는 등 제도권 교육 또한 두루 거쳤다. 응용미술을 전공해 구상 능력이나 배치 등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그 시대 호남에선 마지막 도제 교육생이었어요. 눈으로 본 스승의 것들을 고스란히 따라서 하는 방식을 익혔죠. 사군자, 문방사우, 서예 등의 다양한 전통 한국화 기법을 체득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왔습니다.”

남리 허임석 작가는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며 한 평생 화업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작품 활동에 매진한다. 작가는 최근 작업에서 일상 속에서 볼 수 있는 소소한 감흥의 이야기들을 진솔하고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엄격한 스승 밑에서 오랜 시간 체계적인 기술들을 배워온 만큼 탄탄한 바탕 위에서 품격 있는 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의 초기 작업들은 문인화를 비롯한 실경(實景) 위주의 전통 산수로 지필묵을 통해 우리 생활 속 감흥의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드러냈다.

최근 그는 일상 속에서 볼 수 있는 소소하고 풍속적인 것들을 작업 소재로 삼고 있다.

“어렵지 않은 얘기가 참 재밌어요. 저는 우리 주변의 밝은 모습들을 그리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 스마트폰 등 그 시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도구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느낄 수 있어요.”

허 작가는 주로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속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아는 만큼 그 사람이 보인다고 하죠. 사람은 알면 알수록 아름답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순수한 얼굴이 참 보기 좋아요. 내 가족,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아이들의 행동들에는 각자의 습성이 꼭 드러나 있어요. 그걸 그림으로 표현해내려 합니다. 참 흥미로운 작업이에요.”

그림 곳곳에서는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모두가 어우러져 함께 노니는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평안한 마음을 준다.

‘각설이’ 91x116.8㎝ 장지에 수묵채색<2021>

남도 문화를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 ‘각설이’도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민초들이 갖고 있는 고단한 삶의 애환을 담았지만 그림 분위기는 밝다. 풍물, 깡통 등을 들고 저잣거리로 나선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웃음기가 가득하다.

“‘각설이’는 장이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동냥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요. 민중들의 삶에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광대의 역할을 했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해학과 풍자로 설움을 풀어내려 했던 이들의 신명나는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냈습니다. 사람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가 있어야 우리가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거예요.”

허 작가의 그림이 향한 곳은 자유로움이다. 그는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유쾌한 그림 작업들을 해오고 있다.

‘새소리’ 116.8x91㎝ 장지에 수묵채색 <2021>

“제 그림은 어렵지 않아요.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새어 나오는 그런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향성이나 시사성을 갖고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사람들이 제 그림을 통해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길 원합니다. 또, 작가의 작업 과정에 즐거움이 없다면 이는 왜곡이나 침체로 이어지기 쉬워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작업량도 많아지고 이에 따라 깊이가 더욱 생기는 거죠.”

작가는 동구 동명동에서 누구나 찾아와 차를 마시고 그림을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는 소통 공간인 ‘남리 갤러리카페’를 2년째 운영하고 있다. 사진은 갤러리카페 전경.

아울러 그는 이 시대 작가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당부했다.

“온고지신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게 좋은 건 아니에요. 제 아무리 목표만 바라본다 해도 뿌린 게 없으면 거두지도 못하는 법이죠. 디지털과 무한한 실험이 난무하는 이 시기 저는 인위적인 표현에 집착하지 않으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바탕 위에 시대에 따른 현대화가 뒤따라야 비로소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며 40여 년간 화업 인생을 오롯이 걸어온 그는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제가 지금 서있는 위치는 답습기도 완숙기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걸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까지 저는 비교적 엄격한 기준에 맞춰 왔어요. 이젠 조금씩 놓아보려고 해요. 지금의 그림보다 더 단순해지려고도 합니다. 가령 나무를 예로 들어볼게요. 열 개의 가지를 전부 그리기보단 단 하나로도 모든 걸 드러날 수 있게 말이에요. 하나의 작은 선으로부터도 풍만한 느낌을 주고 싶어요.”

한 평생을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살아온 그에게 그림은 어느덧 삶의 전부가 됐다.

“저에게 그림은 일상입니다. 평소 제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감성이 자연스레 그림 작업에도 나타나길 원해요.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매진하는 게 바로 그림 작업이에요. 그만큼 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성취감이나 즐거움을 찾으니까요. 그 이상은 바랄 게 없어요. 오늘도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붓을 잡고 있습니다.”

허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는 내부 갤러리 모습.

/글·사진=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