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밥상을 지키는 사람들](2)함평군 나산면 모정마을 조영심씨 ‘집장’ 함평 해(海) + 야(野)가 빚어낸 넉넉하고 깊은 맛 정성 가득한 메줏가루·새우젓, 비법 고춧잎이 만든 기다림의 미학 11가지 재료 조화로움, 감칠맛 더한 특유의 풍미 겨울철 밑반찬 ‘딱’

2022년 02월 15일(화) 19:10

죽산 안씨 집성촌인 모정마을은 뒤로는 옥녀봉이, 앞으로는 나산천이 흘러 예로부터 터가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강산이 아름답기 남쪽에서 으뜸이라
(江山佳麗冠南川)
좋은 모임 오래 오래 노소가 함께하니
(勝會百年咸老小)
잔을 들며 서로 즐겨 몇 세월이 지났는고
(擧盃相樂幾春秋)

조선 문신 안여기(安汝器)가 당대에 살았던 마을을 예찬한 시로써 빼어난 강산을 벗 삼아 사람들의 웃음꽃이 피어날 듯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곳은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모정마을이다.

뒤에는 옥녀봉이 있고 앞에는 나산천이 흘러 예부터 터가 좋기로 이름난 모정마을. 450여 년 전, 문신 안충달(安忠達)이 입촌한 후 죽산 안씨 집성촌으로 오늘날까지 마을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 300호가 넘었던 마을은 이제 70가구 정도가 어울러 살아간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산과 들에서 나는 제철 먹거리들을 이용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음식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1990년대 ‘전남 함평군 나산면 모정마을사’에 따르면 둠벙주, 묵덕장, 산자, 집장이 소개돼 있는데 집장은 모정마을의 토색음식임을 알 수 있다.

전통방식으로 손에서 손으로 이어온 집장의 비법은 선조들의 지혜가 집약된 발효과학의 산물이다.

평범한 시골 마을의 음식 문화이지만 집장은 여러 고문헌에 나타나 있다. ‘규합총서’를 비롯해 조선 후기 ‘산림경제’에는 ‘집장이 밀양, 전주, 나주, 예산 등 수백 년 동안 만들어 온 유익한 전통장’이라고 밝힌다.

집장을 먹기 시작한 지 오래됐고 널리 해 먹었다는 점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춰 잊혀져가고 있다. 현재 모정마을에서는 집장을 한두 집 정도 만들 뿐이다.

집장은 채장, 즙장, 두엄장, 보리겨떡장 등 부르는 이름이 다양하다. 농촌진흥청이 편찬한 ‘전승, 종가음식 잇다’에는 ‘여러 재료를 모아서 만든 귀한 장’을 집장(集醬)이라고 뜻풀이를 하고 있다.

모정마을 사람들은 ‘집장’이라고 불러서 필자는 이 용어를 사용하겠다.


집장은 각 지역마다, 집안마다 만드는 시기와 법이 달라서 장맛도 다르다.

오늘날 모정마을에서 집장의 명맥을 잇고 있는 조영심 씨의 장맛은 어떨까? 그 내력은 시어머니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꽃다운 21살, 고향인 신안 자은도에서 집장을 모른 채 내륙으로 시집온 그에게 과업이 떨어졌다. 과업이란 ‘집장을 직접 담궈 봐라’는 것.

손끝 야무진 시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비법으로 40여년 한해도 빠짐없이 집장을 담으며 가풍을 꿋꿋하게 지켜온 조영심 씨. ‘안씨 집안 음식 가보 1호’인 집장을 만들어낸 그녀의 자부심은 그 누구보다도 크고 높다.

“열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내 손으로 해야 는다”라고 시어머니가 말씀하셔서 며느리는 순종했다. 항상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쪽머리를 했던 시어머니는 대쪽 같아 보여도 며느리한테 자상하게 훈수를 두셨다. 입맛 까다로운 시아버지 때문에 손끝 야무지게 음식을 했던 시어머니인지라 집장 만드는 법을 전수하는 가르침에 막내며느리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메모를 해두었다.

집장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메줏가루다. 한여름 7-8월부터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재료는 비옥한 함평 땅에서 자란 밀과 노란 콩. 삶은 밀과 콩을 따로 발효시키려면 뙤약볕이 내리쬐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고온에 띄우는데 낮밤의 일정한 온도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하얀색과 노란색 곰팡이가 피면서 구릿한 냄새도 나고 가느다란 실이 생겨 쭉 늘어나는데 이는 잘 띄워졌다는 신호이다. 콩은 2박3일, 밀은 3박4일 정도 띄워야 최적기이며 일주일 정도 바짝 말리면 메주 맛이 변질되지 않는다. 가루로 만들어 1대1 비율로 섞으면 메줏가루 완성. 냄새는 청국장보다 덜 나고 맛은 담백하니 구수하다.

집장의 맛을 좌우하는 메주는 비옥한 함평 땅에서 자란 콩과 밀을 삶아 한여름 비닐하우스 안에서 따로 따로 고온으로 띄운다

집장의 간을 결정짓는 새우젓도 만들어야 한다.

함평의 인근 해역인 영광 바다에서 새우잡이 철이 되면 그는 배에서 갓 잡은 새우를 사러 발품을 판다. 옛 어르신들이 “찬바람이 날 때 소금을 사면 쓴맛이 난다”고 해 꼭 6월20일이 넘으면 신안의 천일염을 구매해 새우와 버물러 젓갈을 담는다. 항아리에 발효되는 새우젓은 집장을 감칠맛 나게 하는 이 집만의 비결이다.

이번에는 집장을 삭히고 단맛을 내는 엿기름이다. 서리가 내리는 10월 말경, 보리 싹을 잘 틔워 말려야만이 당도가 높은 엿기름이 된다. 빛깔 곱고 맛있는 조청은 이 엿기름에 달려있다.

집장의 재료 중에 반드시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채소가 있다. 바로 고춧잎이다. 해마다 고추농사를 짓는 그는 서리가 내리기 전에 최상의 고춧잎을 따서 소금에 절인 후 물기를 짜서 보관해 둔다.

이렇게 재료들을 꼼꼼하게 준비한 후, 11월 말에서 12월 초쯤에 집장을 담근다. 맛 좋은 가을 무와 쪽파를 썰고 마늘과 생강을 다진 다음, 고춧가루, 고춧잎, 메줏가루, 조청, 새우젓, 통깨를 함께 버무린다. 여기서 집장이 잘 삭히도록 다시마, 북어, 뒤포리로 우려낸 육수에 끓인 찹쌀죽을 넣는 것이 필수. 저울 없이 모든 재료들을 눈대중으로 넣어 버무리는 그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집장을 만드는 과정은 미생물을 배양하고 햇볕에 살균하고 발효와 숙성에 필요한 효소를 생성하는 과학이다.

12월 초에 담그는 집장은 맛 좋은 가을 무와 쪽파를 썰고 마늘과 생강을 다진 다음, 고춧가루, 고춧잎, 메줏가루, 조청, 새우젓, 통깨를 함께 버무린다. 우려낸 육수에 끓여낸 찹쌀죽을 꼭 넣어야 제맛을 낼수 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약 6개월에 걸쳐 만드는 집장은 오랜 기다림과 정성 없이는 맛볼 수 없다. 없던 시절에 옹기에 담아두고 먹는 집장은 겨울철 밑반찬으로 훌륭했다. 시어머니의 노하우를 물려받은 며느리는 시행착오 끝에 집장 맛을 제대로 내는 고수가 되었다. 이런 내공이 쌓여 안씨 집안의 음식 가보 1호, 집장이 탄생된다.

집장은 된장처럼 여러 달 발효시키는 것이 아니라 막 담아서 먹거나 삭혀서 먹는 속성 장이다. 갓 담으면 되직하니 빨강색인데 삭히면 묽어지고 불그스레하니 윤기가 난다. 집장을 맛보면 약간 매운 듯 달짝지근하면서 특유의 풍미가 입 안에 머물고 씹히는 무와 고춧잎의 식감이 좋다. 따끈한 쌀밥에 집장을 쓱쓱 비벼 먹으면 꿀떡 넘어가니 밥도둑이 따로 없다. 총 11가지 재료가 녹아있는 집장은 보양식 못지않다.

“옛날 음식을 해먹어서 좋고 시어머니한테 집장 배우기를 잘했다”라고 말하는 조영심 씨. 올해 나이 예순 일곱인 그는 40여 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집장을 담아 가풍을 꿋꿋이 지켜왔다.

남도 바다의 깊이와 함평 들녘의 넓이를 넉넉히 품어낸 맛이 그의 집장에 오롯이 담겨 있다. 함평 모정마을에서 해(海) + 야(野)의 재료를 모아 맛있게 익어가는 집장이 내일도 쨍하고 뜨기를 바란다.



<남도밥상탐험대=최지영·남정자·박기순·조장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