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과 자멸적 유희 / 천세진
2022년 02월 20일(일) 18:41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시집이 뉴스 영역에서 사라진 시대지만. 시집 출간 소식으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지난달,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시인들>이 시집 ‘붉은 꽃을 내 무덤에 놓지 마세요’를 펴냈다. 출판비용을 제한 판매수익금은 미얀마 군부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가족에게 보낸다고 한다.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기쁨의 자리에 무거운 아픔이 찾아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붉은 꽃을 내 무덤에 놓지 마세요’는 2021년 2월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 독재를 재개하며 1980년 광주를 떠오르게 하는 사건을 벌였을 때, 전북작가회의 회원들로 구성된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시인들>이 2021년 봄부터 미얀마의 민주화그룹들과 연대하며 추진한 것이다. 시집은 전 세계인들을 향하여 미얀마 민주화에 힘을 실어주기를 호소하기 위해 한국어-미얀마어-영어 3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시인들>은 시집 발간과는 별도로 전북작가회의 회원들이 아껴 모은 돈을 미얀마 민주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병초 전북작가회의 회장은 이렇게 전한다. “미얀마는 1980년 광주 그대로이다. 군부와 싸우기 위해서는 일당 5천원 남짓의 돈을 포기해야만 한다. 일당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먹을 것을 포기한다는 말이고 그 말은 곧 목숨을 담보로 싸운다는 의미다. 코로나19로 인해 산소마저 일반 시민들에게는 공급 금지령이 내려졌다, 산소를 얻기 위해서는 군병원으로 가야하고 간다면 군부의 협력자로 변절한다는 의미이다”미얀마에서는 망자의 무덤에 붉은 꽃을 바친다고 한다. 그 꽃마저 놓지 말라는 것은 민주화를 위한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역사가 에드워드 H. 카(1892-1982)는 ‘역사란 무엇인가’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은 낙관론자라고 말하며 “나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도―그것은 움직인다’”라고 마무리했다. 그의 말처럼 어떻게든 세상은 움직인다. 하지만 움직이는 그 세상이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으려면 핍박받는 이들이 점차 사라지는 세상이 되어야만 한다. 겨우 빠져나오나 싶었던 군부독재의 시간 속으로 다시 끌려 들어간 미얀마 시민들에게는 움직이는 이 세상이 에드워드 H. 카가 생각한 것처럼 낙관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간절하게 써도 미얀마에 도움을 주기 어려운 상황에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가 ‘역사를 위한 변명’에 쓴 글이 떠올랐다. 그는 책에서 “앙드레 지드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유희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지적인 유희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그가 1938년에 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1942년에도 그 말이 얼마나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라고 썼다. 1938년과 1942년이 어떤 해인가! 독재자 히틀러가 준동했고, 그의 준동을 막지 못해 온 세계가 피로 물든 시간이었다.

유럽은 전 세계에 걸친 근현대사의 비극을 만든 장본인이다. 우리의 남북 분단도 유럽이 만든 정치적 구조에서 파생된 산물이었다. 유럽의 작가들의 소설에는 여전히 1·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자주 담긴다. 그들이 ‘6·25’보다도 오래된 사건을 반추하는 것은, 자신들의 지적 유희가 냉철하고 명철한 행로에서 벗어나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얀마는 남의 나라고, 미얀마의 군부독재 회귀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그럼 우리는 침묵해야 할까? 침묵은 오랫동안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그건 평온한 일상에서의 경우다. 선행도 악행도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선행은 자신이 천사라고 알려질까 두려워하고, 악행은 자신이 악마라고 알려질까 두려워한다. 침묵하는 동안 우리는 유희에 빠져들 것이다. 유희를 즐기는 사이에 1942년, 1980년을 불러온 무지의 질병에 잠식될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망가진 후일 것이다. 미얀마의 모습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도 지금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냉철과 명철은커녕 적폐 운운하는 증오의 화법만 난무한다. 역사적 진실을 잊고, 물어뜯는 일에 빠져있는 증오의 유희는 자멸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걸 아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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