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교수의 일본 작가 비평](28)‘제8회 한일학술대회’ 단상 -나쓰메 소세키와 안중근 화제-

“조선인(안중근)은 이토가 ‘제국주의 실행 장본인’이라 죽였다”

2022년 02월 23일(수) 20:18
안중근 유묵비(안중근의사기념관 내)
류코쿠대학교 ‘안중근동양평화연구센터’와 ‘안중근의사기념관’ 공동주최로 한일학술대회(온라인)가 열린 것은 지난 16일 오후. 필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향했다.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다(문학과 연극으로부터)-라는 타이틀. 필자의 발표 테마는 ‘나쓰메 소세키와 식민지 지배-안중근 화제 등과 관련해서-’.
한일 과거 현안에 대한 대립이 수그러들지 않는 상황이라 문학의 시점이라지만 안중근 화제를 들추는 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허나 관련 내용에 대한 연구물을 세상에 내놓았던 만큼 그 후의 생각을 정리하게 돼 한편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때로는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고민해야 하는 논점 및 이론(異論)과 맞닥뜨릴 때는 회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 작품 ‘문’의 주인공처럼 절에 들어가 머문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각성과 자극의 순간을 얻기 위해 커피포트에 매달린 횟수를 늘린 게 아니었나 싶다.

- 문병란 시인의 ‘안중근 의사의 권총’ 자료집에 -
제 8회 한일국제학술회의 심포지엄 팜플릿(일본 주최측 제작)

행사 진행자 포함, 심포지엄에 참가한 인원이 150명 이상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코로나 시국인데, 문학과 연극 관련 행사라지만 안중근의 얘기에 이 정도의 인원이 귀를 기울일지는 몰랐다.

우선 신채호와 고토쿠 슈스이 관계를 언급, 신채호의 혁명적인 시론에 대해 논한 부분(자료집) 바로 뒤에 문병란 시인의 ‘안중근 의사의 권총’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분들에게 소개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신채호 선생이 주창한 시혼이 문병란 시인이 평소 추구하던 시적 정서에 흐르고 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결론적으로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문병란은 시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신채호의 시론을 몸소 펼쳐 보이는 활동에 주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권총 / 문병란
이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나
문득 안중근 의사를 생각한다
만주 하얼삔 역두에서
원수 이등의 가슴에 구멍을 냈던
그 날의 통쾌한 총성을 생각한다.

지금은 어디선가
원통하게 녹이 슬고 있을
안중근 의사의 권총
총알이 날아 가버린 총구 속에
까아만 녹이 슬어 있을 역사
그 날의 슬픈 의거를 생각한다.

잠에서 깨어난 이아침
시멘트 바닥이 아닌
카시밀론 이불속에서 잠자고 난 이 아침
나는 어찌하여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는가?
골말에서 손이 빠져나오지 않은 이아침
나는 어찌하여 안중근 의사의 권총을 생각하는가?

이등박문이는 어디에도 없고
이등박문이는 어디에도 있다.
그 날 음흉한 원수의 가슴을 향하여
쏜살같이 날아간 세 방의 총알,
또 한 사람의 안중근 의사는
이아침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너를 오늘 만나보니 너뿐인 줄 아지 말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놈 두 놈 보란 대로
남의 나라 빼앗은 놈들 내 손으로 죽이리라.”

이아침 안중근 의사는
저만치 앉아 나를 꾸짖는데

하얼삔 역두가 아닌
여기는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는 나의 안방
아 나의 빈손은 아직도 골말 속에 있는가.

어디선가 또 하나의 이등은
거만한 목소리로 껄껄 웃는데….
어디선가 또 하나의 이완용은
주구의 혀끝으로 발바닥을 핥는데….

이 시를 일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1909년 10월26일의 하얼빈 의거라는 그 역사적 사건 너머의 이면에 읽히는 함의를 읽어낼 수 있을까? 안중근 정신을 상기하면서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내적 의지를 다지는 시인의 모습이 비친다.

즉 시인은 안 의사가 고통 속에서도 민족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친 여순감옥의 ‘시멘트 바닥’을 자신이 잠에서 깨어난 ‘카시밀론 이불 속’과 대비시키고 있다.

타성에 젖기 쉬운 안락한 이불을 박차고 안중근 정신을 되새기는 자세에 결기가 묻어난다. 격렬한 표현에 대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일본 주최 측의 교수께 설명했더니 흔쾌히 자료집에 게재하자는 답변이었다.

일본 땅에서 여러 난관을 헤치고 ‘안중근동양평화연구센터’를 설립한 재일한국인 교수의 올곧은 판단으로 느꼈다.

류코쿠대학 ‘안중근동양평화연구센터’ 설립에 공헌하신 이수임 교수와 관계자 여러분께 사의를 표한다. 그리고 영상 자막 등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안중근의사기념관’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중요 내용이 자료집에 실리지 못하고 구두 발표로 일본인 청자들에게 전해진 것은 원고 제출 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왜 그동안 안중근과 관련해 일본 작가 중 바바 고초(馬場孤蝶, 1869-1940)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을까?

필자가 게을렀기 때문에 관련 연구에 소홀해서임이 분명하다. 후속 연구 논점으로 진작 언급해야 마땅했었다. 이제야 잊지 않으려고 자성하며 요점만 이곳에 보충해놓는다.


- 바바 고초, “이토는 제국주의 실행의 장본인”이라고 언급 -
바바 고초(1869-1940)
일본 작가 중 소세키의 동료인 바바는 정부의 대역사건 처리 결과에 맞서 저항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이야기를 풀어놓는 게 순서이리라. 소세키의 문하생 모리타 소헤이와 이쿠타 조코 등은 진보적 활동을 하던 사회주의자 사카히 도시히코 일행과 함께 1914년 문예잡지 ‘반향’을 창간한다.

이 ‘반향’의 논객으로 바바 고초와 도쿠다 슈세이 등 다수의 문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 잡지는 ‘주의’나 이념을 초월해 작가들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동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소세키는 ‘반향’의 제목 글씨를 직접 쓰기도 하고 제자인 모리타 소헤이에게 소세키 문하의 좌담에 대해 연재하게 하는 등 이 잡지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바바 고초는 이 잡지에서 활동하던 동료들의 지원으로 1916년 중의원 선거에 입후보한다. 그러자 소세키는 사카이 도시히코와 함께 바바의 추천인이 되어 버젓이 추천장의 맨 앞에 이름을 올린다(이미 소세키는 1906년 동료에게 쓴 서간에서 자신이 사카히 도시히코와 함께 전차 요금 인하 투쟁을 벌이다가 신문에 나와도 지장이 없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

또한 그는 지원활동의 일환으로 간행한 ‘바바 고초 씨 승리 입후보 후원 현대문집’에 ‘나의 개인주의’를 그 잡지의 초입에 게재했다.

‘나의 개인주의’는 권력과 금력의 남용, 국가주의의 개인 통제 상황에 대한 소세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평론이다.

아무튼 바로 그 내용을 바바의 후원 문집의 도입부에 실은 것이다.

대역사건 관련자들의 처형 직후(1911년 초) 보인 소세키의 박사학위 거절의 행보나, ‘문예위원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등의 반권력적 문장과 결부시켜서 논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후속 연구를 기대한다).

바바의 입후보는 권력의 대역사건 처리에 대한 항의 표현이었다고 알려지는 만큼 그는 반정부활동을 펼치던 그의 형을 닮아 매우 진보적이었다.

그의 형 바바 다츠이(馬場辰猪, 1850-1888)는 민권운동의 기수. ‘천부인권론’의 저자이며 1986년에는 ‘폭발물 단속 규칙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바바 다츠이와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이 논설을 담당하던 ‘자유신문’의 말단에 대역사건 주모자로 몰린 고토쿠 슈스이가 합류한 것은 1890년대 후반. 고토쿠는 그들에게 자유민권 사상을 배웠다.  

바바 다츠이가 주축이 돼 조직한 고쿠유회(國友會)에는 나중에(1909년) 고토쿠 슈스이에게 폭탄 제조법(천황 살해 목적과 관련)을 가르쳐준 오쿠노미야 겐시(奧宮健之)도 합류한 바 있다(일본대백과사전, 소학관).

이러한 형의 활동이 바바 고초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고초가 입후보하자 수십 명에 이르는 작가들이 그를 후원했다. 일본 문단 역사상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던 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일본에 번역 소개한 장본인 바바 고초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엔 조선인 편을 들어서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바바 고초가 일본 작가 중 가장 먼저 안중근 의거 직후인 1909년 11월10일 일본 언론과 시민들이 한결같이 이토를 추모하는 상황에서 직언한다.   

당시 이토 사살과 사살 주체에 대해 그나마 진실을 언급한 언론은 러시아나 미국계 한인 언론 정도였고, 신민회의 기관지인 대한매일신보도 조선 총독부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일본 언론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헌데, 바바 고초는 하쿠분칸에서 발행하는 잡지 ‘태양’(1909년 11월10일)에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의 실행이다. 조선인은 이토(공)를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실행의 장본인으로 봤기 때문에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전남과학대 교수
‘안중근의거에 대한 일본 언론계의 인식’(이규수)이라는 논문에서 소개된 바 있는데, 필자의 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보인다.

모든 일본 언론이 안중근을 흉인, 흉한으로 보도하고 그의 거사를 흉행으로 치부하며 오로지 이토 추모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다. 그런데 바바가 양심적 목소리로 직설을 했으니 어찌 이를 평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바는 ‘제국주의 실행의 장본인’이기 때문에 조선인(안중근)이 그를 죽였다며 사살 이유와 사살 주체를 직접 언급한 것이다.

필자처럼 작가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중시하는 연구자에게는 이런 사항이 몸서리칠 정도로 강력한 자극제다. 바바 고초는 소세키와 같은 영문학자이자 평론가, 시인이었다. 게오대학 교수로 부임해 서양 문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나 그가 추구하는 본령이 작품의 집필 활동에 있었음은 강조할 나위가 없다.

문학적, 역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일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문학운동의 중심에 선 바바 고초. 안중근 이토 사살의 사인과 ‘왜’라는 물음 앞에 망설이지 않은 작가가 바로 바바 고초임이 밝혀진 것 아니겠는가.<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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