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의 기억 원천자료는 보존돼야 한다 / 홍인화
2022년 02월 24일(목) 19:41
홍인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지난 1월 故 김영철 열사의 가족들이 기록물을 기증했다. 병원진료기록, 판결문, 진술서를 비롯해 각종 일기와 메모, 편지, 증언 등 모두 19종이다. 지난 23일엔 들불열사기념사업회와 들불열사 관련 기록물 활용 및 기념사업 등 상호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기록물 수집·발굴·보존 및 활용 등 협력사업 추진하기로 했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가 보관해온 기록물은 당시 5 18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는 내용들이다.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최후 항쟁에 참여했다가 희생된 윤상원 열사와 가족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비롯해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열사 자료, 들불야학팀이 주도한 투사회보 등이다.

김영철 열사측이 자료를 기증하기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김 열사는 어렸을때부터 일기를 썼고 지방직 공무원(순천 승주군 변량면)으로 생활을 하다가 1976년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입주해 아파트 공동체 운동에 참여했다. 1978년 7월 들불야학 설립 기반을 닦고 교장을 맡기도 했다. 들불야학 강학들과 학생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투사회보를 제작해 시내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김 열사는 항쟁 동안 몇 번이나 귀가해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열사는 동료들의 의젓함을 보고 도청에 남기로 결심했다. 27일 새벽, 그는 윤상원 열사와 함께 도청 2층 회의실을 지키며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M16 소총은 윤 열사의 배를 관통하는 참사를 불러일으켰다.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말을 하고 쓰러졌다. 당시 옛 전남도청 2층 회의실에 윤 열사의 등에서 배로 총알이 관통하는 걸 보았다. 김 열사는 27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직후 곡괭이 자루로 엉덩이를 흠씬 맞았으며, 체포 다음 날인 28일 새벽 영창 화장실에서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머리를 10여 차례나 찧어가며 자살을 기도했다가 헌병들에 의해 군홧발과 곡괭이 자루로 또 폭행당했다. 그해 8월부터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김 열사는 1981년 12월25일 성탄절 특사로 출소했지만 뇌수종 등 진단을 받고 16년여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투병하다가 1998년 8월16일 영면했다.

‘80년 당시 김열사 부인 김순자씨는 80년 5월26일 만삭의 몸으로 상무관으로 도청으로 남편을 찾으러 다녔다. 광천동 집에는 형사들이 가택수색을 하고 자료들을 가져갔다. 영창에 있을 때 그럼에도 가족은 아버지의 일기를 비롯해 필요한 자료를 아파트 옥상에 오랫동안 숨겨놓았다. 김영철씨가 1984년부터 국립나주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그 당시는 편지를 쓴지 어쩐지도 몰랐다. 2000년경에 시청에서 파견된 실태조사원이 김영철 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이야기를 들은 김순자씨가 병원에 가보니 그 편지가 고스란히 병원 기록 보관함에 있었다. 아들과 딸 둘을 키우랴 남편 간호하랴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 아내 김순자씨도 틈틈이 수기를 썼다. 그것들을 모아 기록관에 기증했다.

또 한편 15년 전부터 윤상원, 박관현, 신영일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기록들을 모으고 있었다. 꽤 많은 양을 모았지만 보관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약 12년 정도 방치되다가 기록물을 찾았다. 훼손된 부분이 많았지만 보존하고 복원하면 충분히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80년 5월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 다음세대 MZ세대에게는 원천자료가 중요하다. 그래서 기록관은 원천자료에 근거하여 지금 5·18의 역사성으로 다시 되돌아와 광주 시민의 사회적 기억을 찾아야 한다. 5·18기록이 계속 모아지고 보존돼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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