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밥상을 지키는 사람들](3)해남군 화산면 송평마을 한순례 씨 ‘해우국’ ‘바다의 까만 옷’… 삶에 위로를 주는 물김의 향기 |
| 2022년 03월 02일(수)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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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팀이 목적지에 이르자 시선을 끄는 풍경이 있다. 쪽빛 물결이 찰랑거리며 1.6㎞에 달하는 긴 모래사장이 초승달처럼 펼쳐지는 곳, 송평해수욕장이다. 2019년에 폐장된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겨 한산하지만 이곳은 태곳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듯 자태를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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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의 낭만이 흐르는 해수욕장에서 먼발치 김 양식장이 보이고 일손들은 분주하다.
30여 년 전, 타지역민들이 김 양식을 위해 신개척지를 찾아 발견한 이곳은 오늘날 송평마을 사람들에게 노다지와 같다. 육지와 가까운 연안으로 수심이 얕고 뻘이 좋아 김 양식하기에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현재 해수욕장에서 인근 송평항까지 걸쳐서 김 양식장 면적은 380여 ㏊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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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때 해남 지역 연안에서 잡은 고기는 일본 놈들이 착취해 갔다”는 옛말이 있듯이 이는 해남의 좋은 뻘물에서 자란 고기나 김이 맛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물김이 한창 나는 시기는 굴도 제철이다.
썰물 때 수많은 갯바위들이 널려 있는 바다의 속살이 드러난다. 크고 작은 갯바위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자연산 굴이 싱싱하다. 때마침 단단히 옷으로 무장하고 장화 신고 굴 따러 나온 아낙네를 취재팀이 만났다. 고희가 넘은 한순례 씨이다. 손발이 시리는 추위 속에 쉼 없이 굴을 캐는 한 씨는 무척 힘들어 보였는데 “저그 물김을 난 28년간이나 했는디 무자게 고생혔제, 굴 캔 것은 하나도 안 힘들제”라고 하며 슬며시 회상에 잠긴다.
꽝~ 징을 친다. 추석 전후쯤, 현재 해남군수협의 전신인 북평어업협동조합에서 김 양식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다. 그러면 어민들은 일제히 1시간가량 노를 젓고 가서 물 빠진 뻘밭으로 향한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나무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뻘에 박고 나서 조각 낸 대나무를 볏짚 새끼줄로 엮어 만든 김발을 짱짱하게 묶는다. 이렇게 바다에 시설물을 인위적으로 해 놓으면 김씨앗인 포자가 대나무에 붙는다. 처음에는 쥐털처럼 붙어있어 빨강색을 띠는데 밤낮으로 햇빛에 노출됐다가 바닷물에 잠겼다가를 반복하면서 빛깔 좋은 까만 김으로 자란다.
대목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고향 장흥을 떠나 해남 북평면에서 살았던 한순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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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18세에 가난한 남편과 결혼한 후 시작한 일이 당시 북평면에서 많이 성행했던 물김 채취였다.
찬바람이 부는 11월이 되면 배에 줄을 걸쳐 놓고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그것도 맨손으로 미끌미끌한 김을 뜯어낸다. 망태에 김을 가득 담아 짊어지고 무거운 장화를 신은 채 개펄을 걸어 나오는 일은 남자의 몫.
집에 와서 물기를 뺀 김을 털어서 거적때기에 널어놓고서야 쪽잠을 청한다. 새벽 2-3시 쯤에 다시 일어나 여러 공정을 거쳐 김 한 장씩 건장에서 말려야한다. 한 번 작업한 양을 마무리해 놓고 또 바다에 나가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김 말리기는 보통 하루 정도 걸리는데 비가 와서 못 떼어 빨개진 김은 ‘골태’, 잠을 자버려서 그 날 못 떼는 김은 ‘잠태’, 노랗게 변한 김은 ‘노랑태’, 곪아버린 김은 골태”라고 한 씨는 말한다.
유리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거무스름한 ‘생태’가 최고로 좋은 김인데 이 김 한 장을 얻기가 결코 쉽지 않다. 겨울철 내내 추위를 이기며 섬세한 손길이 있어야만 값진 김을 손에 쥘 수 있다. 그렇게 공들인 마른 김은 매우 귀했던 시절이라 수협에 내다 팔면 짭짤한 돈이 되었다.
생활 터전인 바다에서 물김을 다룬 해남 사람들은 천혜의 자원으로 신토불이 맛을 구현해 내고 있다. 바다 일을 하고 언 손발을 녹일 새도 없이 아낙네들이 물김으로 후딱 끓여서 밥상에 올리는 해우국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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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국은 힘든 노동에 지친 입맛을 살려주며 찬 속을 뜨끈하게 녹여주는 피로회복제와 같다. 해남 사람들이 처음에 바다 해(海), 옷 의(依)자를 써서 ‘해의국’이라고 했는데 발음이 쉬운 사투리로 ‘해우국’이라고 불렀다고 현재 김성주 해남군수협 조합장은 전한다.
낯선 취재팀에게 해우국을 맛보여주겠다며 후한 인심을 쓴 한 씨는 자신이 사는 동네로 앞장섰다. 해남군 화산면 송평마을은 약 300년 전, 전주 이씨가 강진에서 와서 마을을 일궜다고 한다. 이곳에는 약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방풍림이 있는데, 과거 이 동네 사람이 농사를 위하여 해풍의 피해를 막을 요량으로 수많은 소나무를 심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진다.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방풍림은 마을 공동체를 살리는 희생이 서려있고 오늘날까지 그 푸르름이 창창하다.
땅에서는 넉넉한 농산물, 바다에서는 다양한 어종들이 나고 김 생산량은 해남에서 둘째갈 정도니 마음까지 풍족해지는 마을이다.
북평에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타지에서 홀로 자식들을 키웠던 한 씨는 해남이 그리워서 지금 송평마을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물김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됐지만 겨울이 되면 그는 해우국 맛을 못 잊어 자주 해먹는다.
“동네 사람들이 김국을 해묵는다고 허니까 그 얘기를 듣고 해묵어 봤제”라고 말하는 한 씨.
만드는 법도 모른 채 지레짐작으로 처음 시도해 보았던 해우국은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그 맛이 대단했고 가족들도 덩달아 “맛있다”고 치켜세워 줬다. 그도 그럴 것이 종가집 며느리였던 친정 어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은 요리솜씨가 수준급이다. 물김철마다 해우국은 이 집에서 으뜸가는 ‘진미’로 등극하곤 한다.
해우국에 들어가는 재료는 물김, 마늘, 조선간장, 참기름이다.
가장 맛있을 때인 물김을 그냥 먹어보면 비린 맛이 없고 씹을수록 김 향이 좋아 신선함 그 자체다. 이 물김을 깨끗이 씻어 팔팔 끓인 물에 넣으면 까만 김은 녹색이나 빨강색으로 변한다. 이어 다진 마늘과 조선간장을 넣는데 조리 전에 맛 본 산뜻한 물김 향은 열 배나 진하게 코끝에 확~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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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직전에 참기름을 넣는 것이 화룡점정, 7분 만에 해우국이 완성된다. 해남 사람들은 해우국을 쌀뜨물 또는 된장, 들깨가루, 굴을 넣기도 하여 다양한 조리법으로 해먹는데, 한 씨는 깔끔하고 물김 본연의 맛을 좋아해서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한다.
해우국을 맛있게 만드는 노하우를 물으니 한 씨는 “간만 맞으면 돼”라고 말한다. 간이 잘 맞는 비결은 조선간장에 있다. 메주를 만들어 짚을 깐 뜨끈한 방에서 잘 띄워 말린 후 천일염으로 옹기에 장을 담그는 일을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지켜가고 있다. 그가 직접 빚은 묵은 장맛이 해우국의 맛을 한층 더 깊이 있게 한다.
뜨끈한 해우국을 한 입 맛보면, 짧은 시간에 뚝딱 만든 요리가 고소한 참기름과 향긋한 물김의 조화로 이렇게 환상적일 수 있을까 싶다.
맛의 풍미는 바다의 깊이마냥 풍부하다. 씹을 것이 없지만 입 안에서는 파도 같은 감동이 밀려든다. 국그릇 채 들고 후루룩~ 마시면 추위를 사르르 녹여주는 어머니 사랑 같아서 속까지 든든하다. 여기에 해남의 인심을 더해 물김으로 만든 김초국까지 곁들여 주셨는데, 톡~ 쏘는 새콤달콤함에 없던 입맛까지 살아난다. 물김 하나로 색다른 매력을 맛보는 밥상은 해남 바다가 안겨준 소확행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송평마을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까만 옷은 겨울 햇살을 받아 은은한 빛을 뿌린다. 오랜 세월동안 차디찬 바닷속에서 자란 물김으로 맑은 해남 바다의 향을 오롯이 담아낸 해우국은 한순례 씨에게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자 위로이다. 물김 냄새가 물씬 배어있는 그의 삶이 까만 보석처럼 더욱 빛난다.
<남도밥상 탐험대=최지영·남정자·박기순·조장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