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건설 마형렬 회장 회고록(15) 세 사람의 유언을 생각한다 |
| 2022년 03월 15일(화) 1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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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마형렬 남양건설 회장님의 회고록 '막히면 뚫고, 닫히면 열고'를 인용한 것으로, 내용 중 등장하는 이름과 장소 등을 일부 편집했음을 알립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의 유언을 듣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런데 나는 부모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유언을 들은 특별한 경험이 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한 사람은 내가 모셨던 회사의 사장으로부터,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내가 아끼던 후배의 어머니, 또 한 사람은 남재희 사장으로 부터다.
박기팔 사장님. 그분은 내가 동양기업을 그만 두고 두 번째 입사한 동광건설의 대표였다.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장남주 사장에게 회사를 넘겼지만 그 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 함께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광건설은 실질적으로 내 첫 직장이나 다름이 없다. 동양기업에서 2년 가까이 일을 했으나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첫 직장으로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는 동광건설에서 회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기 때문이다.
건설회사라고 하지만 근무한 사람은 박기팔 사장과 오수중 전무, 그리고 나와 신참내기 최홍 등 네 사람뿐이었다. 최홍은 그날 이후 30년 가까이 나와 함께 했으며 남양건설 부사장까지 지내다 지금은 건실한 건설회사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박기팔 사장은 회사를 넘긴 뒤에도 공사를 따와 우리에게 일을 맡기곤 했는데 상당히 멋쟁이였고 인간적이었다. 비록 배움은 많지 않지만 세상 살아가는 이치는 분명히 아는 분이었다. 다만 한량끼가 있어 주머니는 항상 가벼웠다. 나는 그런 박사장이 좋았다. 박사장도 거짓말을 몰랐던 나를 자식처럼 귀여워 해주었다. 가끔씩 나를 불러 술도 사주고 세상사는 지혜도 가르쳐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이 그 시절 폭음을 하며 약간은 방탕한 생활을 해야 했던 까닭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명색이 자기가 사장으로 있던 회사를 남에게 넘기고 자신은 더부살이하는 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장이 아들 영달군과 나를 나란히 불렀다. 그리고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생생한 유언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내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세상을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김모 사장에게 믹서기를 빌려 주었는데 지금껏 임대비 한 푼도 주지 않고 믹서기도 돌려주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며칠이 지난 새벽 4시에 운명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박사장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참으로 많이 울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많이 울었던 것 같지 않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이 컸던 모양이다. 나는 그 분의 장례식 날 많은 조문객들 앞에서 유언을 그대로 전했다.
빌린 돈을 갚을 때 마음이 약해 어음을 회수하지 못했지만 남에게 1원 한 장 빚이 없다는 내용과 믹서기 임대료를 돌려받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는 박사장의 아들과 광주지역 건설업계의 원로인 김양균 헌법재판관의 장인도 계셨다. 내가 박사장의 유언을 큰 소리로 공개함으로써 박사장의 가족들은 빚을 갚을 필요가 없어 졌다.
나는 지금도 왜 박사장이 친구나 회사간부가 아닌 '마(馬)주사'라고 부르던 평사원에게 유언을 했을까 생각하면 의아함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가슴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내게 유언을 남기신 또 한 사람은 한때 나의 분신이기도 했던 최홍 사장의 모친이시다. 우리 회사 식구들이 최군이라 불렀던 최홍 사장은 당시 서중학교를 중퇴하고 회사에 들어왔는데 어찌나 영리했던지 모두가 귀여워했다. 최사장이나 나나 지금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지만 당시의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셨으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학교를 중퇴했으면서도 틈만 나면 책을 가까이 하던 최사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장남주 사장이 회사를 넘겨받으면서 회사 형편상 최군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장사장을 설득하다 지쳐 함께 받아주지 않으면 나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별러 승낙을 받아냈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모두가 젊음이 가져다주는 자신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군의 모친은 장사를 하고 계셨는데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재화(홍)를 부탁한다"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다. 어머니께서는 운명하신 뒤에도 손을 놓아주시지 않아 아들들이 내손을 빼냈다.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도 아닌 남으로부터 두 번씩인 유언을 들은 경험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두 번째 유언에 대한 약속도 지킨 셈이다.
세 번째는 남재희 사장의 유언이다. 20여년 전의 일인데 전남대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말을 듣고 위문을 갔더니 부인이 내게 일러 바쳤다. 남사장이 이렇게 죽게 된 것은 건설사 P회장을 비롯해 U, K, O 등이 지리산 등산을 하면서 모든 짐을 맡기는 바람에 간에 무리가 가서 쓰러졌다는 것이다. 또 남사장도 지리산 천왕봉 등산을 할 때도 아무도 물을 뜨지 않아 가파른 언덕에서 물을 길러가지고 가는데 뱃속에 창자 끊어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파서 짐을 던져버리고 평생 처음으로 욕을 퍼부은 적이 있다고 했다. 결국 그때 간에 무리가 가서 죽게 되었다고 하소연 하면서 부부가 나를 붙잡고 우는 것이었다. 나도 같이 울었다.
그때가 1989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과 미수교국이었는데 전국경제인협회 간부들과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북경에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동인당약방이 있는데 이곳에서 최고의 간장약을 판다기에 사다준 적도 있다. 효험이 있었던지 건강을 회복하여 20여년 가까이 운동을 함께 하며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