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람객이 전남으로 가는 까닭은? / 이지호

2022년 04월 18일(월) 20:03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

전남도립미술관 주변은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지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뒤로는 겹겹이 능선을 이루는 아름다운 산으로 푸르름이 장관이다. 도립미술관에게 자리를 내주고 새로운 자리를 찾아간 광양역이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MNCA), 뉴욕현대미술관(MOMA),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등 대부분의 국공립 현대미술관은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앙에 위치한다. 공공미술관의 경우 누구나 쉽게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도록 관람객들의 접근성을 가장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다.

현재 도립미술관의 위치는 접근성 측면에서는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다. 주변에 주택가나 아파트단지가 없으며 도립미술관 이름이 붙은 버스 정거장 하나 없고 여수에서 오는 버스는 한 대도 없이, 겨우 순천에서 2개 노선 정도가 미술관 앞을 지나며 운행하고 있다. 2021년 3월 22일 개관전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다’를 시작으로 현재 리움미술관 순회전까지, 약 1년간 9만명의 관람객 성과를 되돌아보면 기적 같은 기록이다.

유례없는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일상조차도 봐주질 않고 무섭게 위협해 오고 있다. 벌써 2년이 지났지만, 더 연장된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쏟아진다. 지역 커뮤니티와의 상생을 목표로 하는 도립미술관은 이런 상황에서 손 놓고 있을 수 없다. 사회 안전망이 집중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어민들은 더 소외되고 희생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여파로 서울까지 이동이 어려운 도민들이 전남에서 세계적인 거장과 만날 수 있도록 국내 최고의 사립미술관인 리움미술관과의 협업을 시도했다. 도립미술관은 리움미술관 기획전 ‘인간 일곱 개의 질문’을 지난 2월 24일부터 5월 29일까지 개최하는 중이다. 인간 실존에 관한 성찰을 주제로 거울 보기, 펼쳐진 몸, 일그러진 몸, 다치기 쉬운 우리, 모두의 방, 초월 열망, 낯선 공생 등 일곱 개의 질문을 던지는 형식의 구성으로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먼으로 이어지는 사회학적 현상에 주목한 전시다. 이브 클랭, 데미안 허스트 등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적인 작가 45명의 109점이 소개돼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연일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특별전시다.

우선 전시장 입구를 장식한 20세기 대표 조각가이자 실존주의자였던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위대한 여인 III’은 리움미술관 소장 이후 30년 만의 외출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1·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했던 파리에서 공동 수도와 화장실을 쓰는 7평의 허름한 아틀리에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미술시장에서 2천억원을 호가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조각품이다. 전쟁의 거센 폭력 앞에서 여성성이 거세된, 뼈대만 앙상한 가늘고 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 조건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리고 중앙 홀 전면에는 미국 조각가 조지 시걸의 브론즈 조각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뉴욕 지하철 역에서 밀려 나오는 평범한 미국 시민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다. 무표정하게 출근하는 사람들 모습의 이 조각상은 군중 속에 있으나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미국 현대미술의 전설과도 같은 이 작품은 일생에 한 번은 꼭 봐야 하는 조각 중 하나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앤디워홀의 ‘마흔다섯 개의 금빛 마릴린’이 보인다. 검은색 바탕 속 금빛으로 수놓아진 마릴린 먼로는 1960년대 할리우드 스타의 화려한 삶의 이면에 그리워진 비극적 죽음을 암시한다. 죽음조차도 매스미디어에서 소비되고 쉽게 다뤄지는 점이 더 애석하게 느껴진다. 이 세 작가 외에도 매튜 마니, 데미안 허스트, 이건용 등 소위 거장이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작가의 대표작들이 총출동한 대규모 전시다.

팬데믹으로 인해 우울감과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마다 증상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 국내외에서 고독과 우울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미술관을 찾는 이가 늘고 있다고 한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9만 명의 관람객이 다년간 도립미술관 사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비록 교통이 불편하고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인간 일곱 개의 질문’전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전시가 끝나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 향후 10년간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관람하길 부탁드린다.

그동안 보내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전남도립미술관은 ‘인간 일곱 개의 질문’전에 이어 1·2차 세계대전 속에서 인간의 연민과 소외된 이들의 공감을 예술로 승화한 20세기 미술의 거장 ‘조르루 루오’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해외 거장의 명화전은 기획사들이 추진하다 보니 주로 관람객이 많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전시는 전남도립미술관 자체 기획으로 전남에서만 볼 수 있다. 서울 관람객들이 전남에 내려오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