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弔鐘) 소리가 들릴 때 / 천세진 |
| 2022년 05월 15일(일) 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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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넘게 살았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1908-2009)는 인종은 12-24개에 불과하지만, 문화는 수천 개라고 했다. 그 견해를 확장하면 모든 인간이 서로 다른 ‘문화 인종’이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산 시대의 문화유전자를 영육 속에 축적하지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더라도 사람마다 축적의 양과 질은 모두 다르다. 그 차이를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구조주의 인류학의 핵심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수평론이 아니고 독성 가득한 수직론이 득세한다. 모두가 수평적 사유를 한다면, 낮은 곳으로 물이 모이듯이 고통 없이 자연스럽게 문화축적이 이루어질 것이다. 누구나 그 일을 반기고, 자신이 그런 길을 가려고 애쓸 것이다. 남다른 문화적 축적을 이룬 사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보물 같기 때문에 온도차 없이, 분분한 견해 없이 흔쾌히 받아들이고 칭송할 것이다.
실제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榮)과 욕(辱)이, 칭송과 비난이 번갈아 뒤집혀 나타나고, 독과 약을 함께 먹고서야 견딜 수 있는 일들이 수시로 생을 뒤집는다. 세상이 품은 독성을 줄이려고 애쓰는 이들은 자신의 삶과 예술작업 속에 평범한 이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깊이와 넓이, 무게로 문화를 축적한다. 안타깝게도 그 문화는 어둠과 밝음을 함께 갖고 있어서 축적하는 당사자에게 감내하기 힘든 무서운 고통을 안긴다. 김지하 시인이 바로 그런 혹독한 경험을 한 분이었다.
한 사람에게 쌓이는 문화적 축적은 신고(辛苦)의 날들을 다 살아낸 다음에야 결과물이 드러난다. 독성의 세상을 견디며 거목이 피운 꽃들은 하나같이 독한 가시 사이로 핀 탱자나무 꽃 같다. 꽃이 갖고 있는 향기도 가벼움과 무거움, 옅음과 진함이 어지럽게 섞여 있어서 형언하기 어렵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질곡의 생을 사셨던 시인의 끝자리를 향해 어떻게 처연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명과 암의 진폭과 무게를 더 많은 경험 정도로 여긴다면 그 생의 의미를 다 읽지 못한 것이다. 김지하 시인께서는 『생명』(1992)의 서두에 “지난 젊은 시절 감옥과 병원, 술집을 전전하면서 살아왔고 온갖 신경질환이나 초조감, 불안, 여러 가지 욕구 불만에 시달리면서 술로 마음을 달래고 그 결과 병을 얻고, 입원하고, 퇴원하고, 여러 가지 불만이나 이런 것 때문에 격렬하게 나 자신을 난파시키는 식으로 세상에 부딪혀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저는 찢어진 사람입니다. 생명력을 상실하고 생명이 파괴된 사람입니다”라고 쓰셨다.
그 형극의 고통은 시대를 대신해서 겪은 것이었다. 고통스러운 족적의 연원과 무거움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고 단선적 종결로 언명하려 한다면 과거는 아랑곳없이 살아가는‘문화 문맹文盲’의 삶이 남을 뿐이다. 앞선 세대가 품을 수밖에 없었던 문화유전자와 그들이 견뎌야 했던 독성의 시간이 남긴 후유증을 모두 해독해야만 외눈박이 사유, 외다리 사유가 되는 것을 겨우 면할 수 있다.
한 시대가 저무는 소리가 지금 울리고 있다. 힘겹게 지고 계셨던 무거운 지게에 이제 우리의 양 어깨를 들이밀고 단단히 힘을 주어야 하는 시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 지금 들리고 있는 저 조종(弔鐘) 소리는 얼마나 처연하고, 엄중한 울림인가! 부디, 저 종소리가 시대가 저무는 소리가 아니라, 시대가 깨어나는 소리가 되기를 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