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재회 - 의류 수거함 / 김도봉

2022년 05월 29일(일) 19:31

김도봉

썰물처럼 빠져나가 썰렁하더니
새로운 녀석들이 계속 들어와 섞인다
평생을 같이 살다가 사별한 노인
한 번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버림받은 숫처녀
몇 달 동안 씻지 않아
똥 구린내 펄펄 풍기는 놈들도 있다
옆집에 살면서도 우연히 마주칠 때
애써 외면한 아주 어색한 사이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두 팔 벌려 서로를 끌어안는다
좁고 어두컴컴하지만 따뜻하고 정겹다
(시집 ‘길의 배반’, 미네르바, 2021.)

[시의 눈]

단지 내, 단풍나무 아래 녹색 의류수거함이 입을 벌립니다. 늘 차 있어 버릴 옷을 들고 나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합니다만, 오늘은 옷장 정리를 하다가 80년대 입던 양복 상의와 다리를 두 개 넣어도 남을 바지를 넣습니다. 누군가의 흰 셔츠가 삐죽이 나와 있어 함께 움켜 넣습니다. 그 셔츠에 검정 줄무늬 내 양복이 걸쳐지는 듯합니다. 뒤에 기다리던 아래층 아가씨가 빨간 꽃무늬 불리우스를 넣고 있네요. 의류함 속에서 나는 아가씨의 레이스를 잡습니다. 내 옷은 유행이 20년이나 지났지만 아가씨의 블라우스는 말짱 새것인 듯해요. 어쩜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방귀 냄새 밴 누군가의 누비바지가 받치고 있지만 블라우스는 그를 피해 내 양복 속에 묻힙니다. 아, 기분이 좋군요. 마침 수거함을 비워갈 회색 차가 오네요. 아쉽지만 아가씨 어깨에 올린 팔을 내려야 겠지요? 먼 가난한 나라로 가 내려질 때, 운 좋으면 연인처럼, 아니 가족이 될지도 몰라요. 다리미질이나 해서 넣을 걸 하고 후회도 해 봐요. 김도봉 시인은 경북 김천에서 나, 202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고, 산문집 ‘그대는 가을로 온다’(2016)를 냈습니다. 그는 현재란 행적에 과거나 전생의 시·공이 드나드는 경이로운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