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쓸쓸한 해후 / 김문억

2022년 07월 24일(일) 18:58

김문억

학교를 오가면서 목마르면 입을 맞추고 소처럼 먹던 샘물

시린 손 호호 불며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샘물을 흔들어 놓고
샘물 속에 내 어린 그림자를 빠뜨려 놓고
샘물이 흘러나간 봇도랑 긴 물길을 타고 먼먼 곳 대처까지 나갔다가
오랜 세월 지난 뒤 뒷걸음쳐 와봤지만
샘도 나이를 먹어 바싹 늙어 있었네
버짐 먹은 이끼가 얼굴을 덮고 있었네
윤곽이 매우 흐릿한
내 얼굴도 떠 있네
(시조집 ‘양성반응’, 파루, 2021.)

[시의 눈]

어릴 때는 왜 몰랐을까요. 햇빛에 벌겋게 익은 그림자가 늘 뒤따르고 있다는 걸. 그 깡마른 그림자를 샘물에 맡겨놓고 담박질로만 다녔지요. 운동장 귀퉁이 벚나무 아래 만경놀이를 하다 시작종도 잊던 때, 흙투성이 얼굴은 거기 두고 해맑은 표정만 챙겨 교실로 들어가던 때, 그처럼 소나무 밑의 옹달샘은 내 천방지축의 땀을 식혀 주었더랬습니다. 나는 청춘을 먼 ‘대처’에서 보내고 이제 낡은 그림자를 지고 샘 곁으로 와봅니다. 밭고랑 사이 허수아비처럼 나는 펄럭이다 멈추지요. 아, 옹달샘은 ‘바싹 늙어’ 잦아들었군요. 거기 숟가락만큼 고인 물에 ‘버짐 먹은’ 얼굴을 들이대 봅니다. ‘사나이’가 아닌 늙은이로 난 그만 돌아서고 말지요. 딴은 청춘이란 듯 말이지요. 김문억 시인은 청주 초정리에서 나, 198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고, 시집 ‘문틈으로 비친 오후’, ‘지독한 시’ 등을 냈습니다. 그는 촐기지 않은 나뭇가지로 황토 아궁이에 불을 지펴 풍자와 해학의 뚝배기를 끓여 내는 구수한 시인입니다.<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