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최정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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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을 내리고 지그재그 흩날린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그림, 북쪽에서 태어난다 바람을 타고 띄엄띄엄 허공을 채우는 소문, 첫 행이 시작된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붙이고 손을 내민다 국경을 모르는 아나키스트, 확신은 아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혹시와 어울린다 같은 장르는 아니지만 이따금 역사와 함께 출몰한다 손끝에 닿으면 이별의 역사가 녹아내린다 반드시가 수시로 연락하지만 진심을 확신할 수 없다 깨어진 약속이 이 말을 수긍할지도 모른다 따뜻한 동사를 편애하지만 응달에 혼자 머문다
(시집 ‘독거소녀 삐삐’, 상상인, 2022.)
[시의 눈]
지난 생을 돌아봅니다. 사실 난 눈을 ‘지그시’ 감을 때가 거의 없었지요. 발등에 불끄듯 펄펄 살아야 했거든요. 철들면서부터 고생 좀 했지요. 아니 고생하면서 눈을 더 크게 떴어요. 외톨이로 ‘지그재그 흩날’리듯 세상을 건너왔습니다. 전쟁 통에 헤어진 후, 이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닫고 그를 ‘지그시’ 생각해 보아요. ‘혹시’ 연락이 올까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습니다. ‘반드시’ 그는 만나야 할 사람이었지만, 세월은 녹슬고 ‘수시 연락’ 같은 말만 남게 되었지요. 하면, ‘지그시’ 뜬 눈마저 아예 닫았단 거네요. 처음 ‘손끝’ 닿아 떨던 당신과 나는 ‘이별의 역사’를 각자 쓴 셈이군요. 당신은 다리 건너 돌아올 기미조차 없어요. 하지만 또 생각해 봐요. 다 포용하리라. 아, 머리로는 ‘따뜻한 동사’를 외워 둡니다. 지하 ‘아나키스트’로 기다리지만요. 최정란 시인은 경북 상주에서 나,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 ‘여우 장갑’(2007), ‘입술 거울’(2012), ‘사슴목발 애인’(2016), ‘장미 키스’(2018) 등을 펴냈습니다. 그는 발랄 신선한 언어 감각에, 때로 비 같은 비애의 마디를 꺾어 시의 화병에 꽂는 시인입니다.<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