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희망은 먼 곳으로부터 / 배경희

2022년 09월 25일(일) 19:28

배경희

나뭇가지 툭 꺾이며
고요가 놀란다
덜 익은 도토리가
의지 없이 떨어지듯
말없이 지는 가을을 바라보는 늙은 남자

의자를 다 태우고
아스피린을 끊었다
평범한 시간들을
햇빛처럼 읽어줄 때
희망은 먼 곳으로부터 뿌리를 발견한다
(시조집 ‘사과의 진실’, 시인동네, 2022)

[시의 눈]

가을 고공으로 푸른색을 던집니다. 팽팽한 시선에 걸린 코발트빛은 첼로 현을 퉁길듯합니다. 고혈압·고지혈증 같은 건 내게 까마득하다 했는데, 어느새 턱밑까지 쫓아왔습니다. 해서, ‘의자’ 감옥을 탈출해 늘 산의 등걸에 동행하지요. 상수리나무와 산죽 숲은 날 음악회로 초대합니다. 먼저 도토리깍지벌레가 환영인사로 열매가지를 ‘툭 꺾’어 내리지요. 불현듯 ‘아스피린을 끊’어버리고 독한 발렌타인 같은 위스키를 마시고 싶습니다. 그치만 송이버섯차 한 모금으로 대신하네요. 이제 바흐의 ‘무반주 프렐류드’를 들어요. 먼 비행운이 천천 지나가기를 바라면서요. 그만큼씩 삶은 ‘희망’을 지닐 때 흔들리듯 이명이 또 지나갑니다. ‘뿌리’ 튼튼하단 착각에 난 그만 따귀 맞듯 일어서고 말지요. 배경희 시인은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흰색의 배후’(2016)를 냈습니다. 그는 부조리에 미치는 이중적 언어 장치를 통해 불행을 희망의 화폐처럼 인출해 내는 시인이지요.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