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천(光州川)을 걷다 / 서기원 |
| 2022년 11월 06일(일) 1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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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川邊)을 걷다 보면 이런 단어,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천변만화(千變萬化)’. 변화는 천가지, 만가지, 천만가지, ‘천태만상(千態萬象)’. 상태도 천가지, 만가지, 천만가지, ‘천차만별(千差萬別)’. 차이도 천가지, 만가지, 천만가지, 광주천도 그렇다. 계절마다 날씨마다 기분마다 ‘각색각양(各色各樣)’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무등산 용추계곡에서 발원하여 한 방울의 물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천(川)을 이루고 강(江)이라는 큰 흐름에 동참할 수 있었다. 광주천을 가운데 두고 천변좌로와 천변우로가 있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길, 사람이 걸어가는 길, 차량이 달려가는 길은 제각각이지만 각자가 병진대칭(竝進對稱)을 이루며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군데군데 이러한 선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고, 그 선상에 점 하나와 같은 내가 있다.
남광주시장을 지나 사직동 전망대가 보이고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시인의 마을 양림동! 거리에 새긴 이름, 돌에 새긴 시(詩), 마음에 새긴 사연, 그곳 플라타너스 길은 절대고독의 시인 김현승의 ‘시비(詩碑)’거리이다.
천변을 따라 조금 더 아래로 걷다 보면 광주공원이 있고, 가수 현숙의 노래처럼 ‘부딪치는 술잔 속에 떨어지는 별을 보며 하늘을 마시는’ 곳, ‘물망초’, ‘봉선화’, ‘사랑방’, ‘마돈나’, ‘목포집’, 정겨운 이름의 포장마차들이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있다. 연탄구이, 한 잔의 술, 왁자지껄한 이야기 속에 광주천은 무심히 흘러만 간다.
양동시장 복개도로를 지나면 스님의 발우(鉢盂) 같은 야트막한 야산에 ‘발산(鉢山)마을’이 있다. ‘청춘발산’이라 했던가. 6·25 전쟁 직후 피난민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됐고, 70년대 천변을 사이에 두고 전남방직이 들어서면서 취업을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청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제는 도시 취약지역 개조사업의 일환으로 청년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발산(發散)은 내부에서 외부를 지향한다. 발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부에 힘이 응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매력이면 매력 발산이, 꽃이면 향기 발산이, 발산마을 입구 간판에 씌어있는 것처럼 ‘청춘발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발산마을이 끌어안고 있는 내면의 힘은 무엇일까? 비탈진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 좁디좁은 골목, 띄엄띄엄 눈에 띄는 밭, 총총 별이 뜨는 달동네이자 산동네, 지금도 서민과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이 계속되는 곳, 나는 이곳에서 밝음보다는 어두움을, 기쁨보다는 슬픔을 느꼈다.
슬픔도 힘이 될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때 광주에서 자취하며 느꼈던 외로움, 재수생 시절 서울 달동네에서 살던 고단한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내면에 차오르는 슬픔 한편으로 어지러이 교차하는 그립고 그리운 감정들.
원지교에서 시작해 네 시간 남짓 천변을 걷다 보니 피안(彼岸)이 아닌 피곤(疲困)이 엄습한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앞을 보니 신기루와 같이 어른어른 극락교가 보인다. “나무아미타불, 여기가 바로 극락(極樂)이로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다가도 계속해서 걷다 보면 어느새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고, 시나브로 무념무상의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