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채의 생각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한 채의 말씀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한 채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터전을 닦는 일은 이미 끝내었습니다.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닦았습니다. 한 그루 대추나무는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우리들의 가난한 양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대패질을 합니다. 나무들의 속살과도 처음인 듯 만납니다. 나 온갖 거짓과의 결별을 끝냅니다 대패질을 합니다. 나는 지금 요염합니다. 머리꼭지까지 가득 차오르는 이 땅에서 가장 장결한 몸, 물빛과도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말씀의 춤을 위하여’, 미래사, 1991.)
[시의 눈]
존재의 속살들은 부드럽고 요염하기까지 합니다. 나도 시인처럼 속살이 흰 나무를 골라와 서가를 꾸민 적이 있습니다. 오롯 당신을 위한 생각의 공간이자 말씀을 새기는 공간이었지요. 우린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주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었지요. 하지만 흰 속살의 나무로 지은 당신과 함께하던 서재는 이제 텅 비었습니다. 그래 생각나는군요. 우리가 만난 건 이십대 초반 늦가을이었지요. 추수가 끝난 풍경들이 숨차게 실려오는 그 배아둥산 가잿골 넘어였어요. 당신은 복숭아빛 속살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처음 내 오두막을 찾아왔지요. 그땐 난 사랑을 말하지 못한 속내를 당신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이젠 지상에 없는 당신의 그 속살을 회억합니다. 오늘은 서재에 파묻혀 라흐마니노프 대신, 카랴안의 흰 지휘봉이 파동치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듣습니다. 내 슬픈 속살이 당신의 벅찬 가슴과 만나 첼로 현으로 뜯기우는 그런 날입니다. 정진규(1939-2017) 시인은 경기 안성에서 나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5), ‘뼈에 대하여’(1986), ‘몸시’(1994) 등 많습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산문시를 본격화하며 관념 극복의 일상성을 회복하고자 했고, 1990년대 이후엔 ‘몸시, 알시, 밥시’ 등으로 몸의 생명성을 천착해간 시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