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겨울 소식

2022년 12월 04일(일) 19:09

조태일

광주를 온몸에 흠뻑 적셔 터벅터벅 그 친구는 서울에 와서
늘 외롭고 힘없는 내 손을 쥐고 눈과 손으로 광주를 건네주지만
내 허전한 마음까지 건네면 쓰나 내 찌든 몸까지 건네면 쓰나
찬바람 속에서 광주는 큰 애를 뱄다더라.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더라.
광주를 온몸에 적셔서 서울의 내 곁에 사알짝 놓아두고
터벅터벅 서울을 떠나버리는 친구!
(시집 ‘다시 山河에게’, 미래사, 1991)

[시의 눈]

“얘야 좀 쉬어 가자” 화순으로 휘는 바람재에 아비는 짐을 부립니다. 아내가 싸준 고구마를 나눠 먹습니다. 김 서방은 15살 아들과 함께 장불재를 넘는 중입니다. 이서장을 보려고 새벽에 나섰지요. 끄응, 오랜 장딴지 힘으로 큰 봇짐을 일으킵니다. 그는 매달 남대문 시장으로 계절옷을 떼러 갑니다. 고향 친구가 사정을 듣고 소개한 백 사장네 가게지요. 옷을 고르며 소식도 골라 전합니다. 서로 ‘허전한 마음’은 빼지요. 가난한 보부상이지만 무등처럼 배부르다 말합니다. 한때 끼니 걱정을 했으나 산은 큰 위안이 되었으니까요. 그는, 내일은 화순장 모레는 담양장 글피는 부자들의 창평장을 돕니다. ‘광주를 건내주’는 친절한 장사꾼이 되어가지요. 사십여 년 전 오월 총칼을 꽃바람처럼 맞으며 누이를 잃었지요. 소낙비 질펀한 눈물을 참 많이도 흘렸습니다. 중봉 낙엽엔 그녀가 오는 듯 버석버석 환상 행진곡이 들렸지요. 이제 그녀는 풍찬 아이를 안은 한 어머니로 바뀌었군요. “얘야 가자” 어머니가 부르듯 걸음을 빨리합니다. 저만치 아들이 문득 뒤를 돌아봅니다. 아, 벙거지 속엔 함박눈이듯 웃음조차 열렸군요. 조태일(1941-1999) 시인은 전남 곡성에서 나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시집 ‘식칼론’(1970), ‘국토’(1975) 등을 냈습니다. 그는 70년대 독재에 저항하며 여러 번 옥고를 치렀으되 끝까지 올곧은 국토의 시인으로 남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