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신작(新作) / 이성부

2022년 12월 18일(일) 18:56

내 마음이 식은땀을 흘리는 것은 어인 일이냐.
죄지어서 떨고 섰는 내 몸뚱어리 어인 일이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고 아무 한 사람 저를 불태워도 죽지 못한다.
먼 사막을 문득 서울 신촌 뒷골목에서 만나
코 막고 눈 감고 무릎 꿇어 귀기울여도 달라진 것이 없다.
상처만 더 깊어졌을 뿐. 안 보이는 곳에서 울음 우는 시간들 더 많아졌을 뿐.
크낙한 돌부처 입다뭄으로 더욱 굳어가고 있을 뿐.
무슨 시(詩)들이 이리 많아서 서로 잡아먹고 있느냐.
무슨 짐승들 이리저리 날뛰고만 있느냐.
(시집 ‘깨끗한 나라’, 미래사, 1991.)

[시의 눈]

요즘은 시의 시대일까요. 이 가난한 지상을 누비는 시가 재봉틀질보다 빠릅니다. 카톡에 카페에 페북에 문자판마다 색실 같은 행복한 시가 넘치지요. 방금 온 좋은 글을 늙은 눈에 담기도 전에 벅찬 날을 예고한 시가 ‘까톡 까꿍!’ 또 두드립니다. 마치 장끼가 까투리 부르듯 새벽눈을 발가벗기려 야단이지요. 하지만 신작 쓰긴 두려워요. 오늘도 자판 앞에 밤을 지샙니다. ‘먼 사막을 문득 신촌 뒷골목’으로 불러오듯, 상상으로 태우는 밤, 태양의 반대편으로부터 오는 긴꼬리 헬리를 붙잡으려 하지요. 한데, 신작은 곧 익숙한 구태의 강에 나자빠지는군요. 불을 뿜는 용의 시는 커녕 이무기도 되지 못합니다. 물뱀으로 흙탕이나 누빌 뿐. ‘식은땀’만 ‘흘리는’ 밤중의 몸부림을 보고 신은 꾸짖습니다. ‘어미 생을 베껴먹는 이눔아, 솔골밭 날뛰는 멧돼지라도 물리칠 주술시를 외거라’. 이성부(1942-2012) 시인은 광주에서 나 195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1962년 ‘현대문학’으로 나왔고, 시집으로 ‘이성부 시집’(1969), ‘백제행’(1977) 등이 있습니다. 그는 고통받는 역사 속에서도 의지를 칼처럼 벼린 시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