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찔레꽃 추억 / 수필 - 박연식

2022년 12월 26일(월) 21:48

찔레꽃 하얗게 핀 오월은 돌아가신 할머니 생신날이다. 찔레꽃은 친정집 대밭 울타리 사이에서 내 친구 정은이처럼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다.

찔레꽃은 다섯 개의 정교한 꽃잎으로 동전 크기만큼 둥글었다. 노란 수술이 유난히 선명하며, 향기까지 은은하였다. 내가 예쁜 바구니에 꽃잎을 따오면 어머니께서는 거피한 찐 팥을 꿀로 반죽하여 밤톨만큼 뭉쳐 찹쌀 반죽 속에 넣어 꽃잎을 살짝 얹어 화전을 부쳤다. 찔레꽃 화전에 오월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지직 지지직 소리에 찔레 꽃잎은 몸을 풀었다. 찔레꽃 향기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군침 도는 나의 유년은 늘 달콤했다. 화전을 부치는 날이면 찔레꽃 향기에 이끌렸는지 멀리서 고모들이 왔고, 직장 따라 광주에 계신 아버지가 도착하시면 연례행사처럼 꽃잔치를 했다.

어머니가 자주 고름 옥색 저고리에 풀 먹인 옥양목 행주치마를 입고 대청에서 부엌으로 동분서주하셨다. 땀에 찌든 무명 수건을 벗고 낭자머리에는 은으로 만든 꽃잠(簪)과 봉잠 서너 개의 장신구가 아름다웠다.

보기도 아까운 화전을 나는 대밭 뒤뜸에 사는 내 친구 정은이와 정은이 할머니께 빨리 갖다 드리고 싶어서 앞마당 대문보다는 찔레나무 사이 개구멍을 통과하면서 가시에 찔려도 별로 아픈 줄을 몰랐다. 옷과 머리카락 그리고 고사리손에 가득 차 있는 찔레향이 가시에 찔린 아픔을 사라지게 했다. 프라이팬 위에서 뒤집는 손놀림처럼 나의 걸음 빨라졌다. 골목과 마을에 찔레꽃 향기 주머니를 풀어놓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좋은 것만 보면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고 다 퍼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까지 지 애비 닮았다고 할머니는 미운 소리를 가끔 하셨다.

정은이는 나와 같은 반이었다. 특히 보조개가 예뻤다. 그의 오빠처럼 노래도 잘하였다. 비가 오면 왕복 삼 십여 리를 비료 포대를 같이 쓰고 학교에 갔다. 친구는 비에 맞지 않게 하려고 비료 포대를 내 쪽으로 더 씌워 주었다. 함께 듣는 빗소리에 우리 우정은 한 뼘씩 더 자랐다. 서슴없이 내리는 비처럼 우리는 깔깔거렸고 빗줄기처럼 꿈 많은 푸른 물그네를 콩콩콩 탓다. 또 눈보라 치면 무명 보자기로 머리를 함께 싸매고 한사람 눈만 교대로 보며 길을 걸었다. “어디만큼 가았냐?” 이런 질문을 서로에게 하면서 인생의 안내자처럼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매서운 겨울을 보냈던 유일한 친구다.

찔레꽃 피는 봄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대로 정은이랑 우리 집 뒤뜰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대밭 밑 양지쪽엔 나뭇가리와 볏짚가리가 무더기로 쌓여있어 아늑하였다. 몽글몽글한 흙으로 소반 짓고 하얀 꽃잎 따서 화전이라 했고, 찔레 우듬지 벗겨 숭덩숭덩 썰어서 열무김치라 했다. 봄볕을 두드리는 소꿉놀이에 뒤뜰의 오후는 늘 설레었다. 볕 한 줌, 꽃향기 한 줌으로 버무려진 아기자기한 소꿉놀이에 봄날이 깜박 졸다 깨어나기도 했다. 우리는 봄볕을 반짝 빤작 빚어 얘기꽃을 피우며 놀았다.

정은이랑 나는 백자 사금파리에 화전과 찔레순을 정갈하게 담아서, 꾸리 감고 계시는 할머니께 한 상 차려드렸다. 냠냠 후루룩하며 맛있다고 시늉하시던 할머니가 그만 둬라 얘기할 때는 소꿉놀이 또한 심드렁하였다. 토끼가 앞니로 풀잎 새기듯 우듬지를 조근거리면 단맛이 입안으로 고였다. 순한 찔레 향 닮은 친구 정은이가 있어 유년이 행복했다. 팔십을 넘겼지만 찔레꽃 피는 오월이 오면 서울과 광주 중간지점에서 만날 것이다.

<박연식 약력>
▲한국수필신인상, 아시아 서석문학 시 신인상, 대한시협 최우수상, 무성서원상춘문학 우수상, 오은문학 디카시 대상, 광주문협 올해의 수필작품상 등
▲광주문인, 아시아서석문학, 광주시인협회 이사
▲ 저서 : ‘함께 밟은 페달’, 서간문집, 디카시집

평설=박덕은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전남대 교수 역임 ▲중앙일보 신춘문예당선

<평설=박덕은 문학평론가>

박연식 님의 수필 ‘찔레꽃 추억’에서의 서술자는 어린 시절 찔레꽃 하얗게 핀 오월을 떠올리고 있다. 할머니의 생신날에 부쳤던 찔레꽃 화전에 대한 묘사가 싱그럽다. 찔레 꽃잎이 몸을 풀고, 찔레향이 가시에 찔린 아픔을 사라지게 하고, 골목에 찔레꽃 향기 주머니를 풀어 놓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등의 표현이 아주 좋다. 중반 이후에는 친구 정은이 얘기로 들어간다. 노래도 잘하고 보조개도 이쁜 정은이, 빗속에서도 눈보라 속에서도, 봄날 소꿉놀이에서도 늘 정겨웠던 친구, 함께한 시간들이 늘 설레었고, 행복했다. 순한 찔레향 닮은 친구 정은이가 있어 행복했던 유년, 팔순이 되어서도 친구가 보고 싶다. 서술자는 오월이면 찔레꽃 향기에 흠뻑 취해 행복했을 것이다. 찔레꽃은 할머니고 어머니이며 친구 정은이인 것이다. 찔레꽃 화전에 서술자의 유년은 노릇노릇 익어갔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가슴 파고드는 뜨거운 향내, 그 분첩 여는 찔레꽃 분 냄새와 함께 청춘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렇게 서술자는 찔레꽃처럼 그리움으로 나이들어 갔을 것이다. 찔레꽃은 추억으로 피는 꽃이다. 무심한 마음의 풍경 속에서도 추억이 건들어지면 문득 피어나는 찔레꽃. 서술의 힘이 돋보이는 수필, 도중 도중 끼어드는 묘사, 화전을 표현하는 솜씨가 아주 세련되어 있다. 막힘없이 쭉쭉 뻗어가는 필력이 대단하다. 이 수필은 적절한 묘사, 사색의 공간 만들기, 그 안에 의미 방울까지 맺히게 하여 더욱더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