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사람 싱거워지기-초옥기(草屋記) / 최승범
2023년 02월 12일(일) 19:45
최승범
전혀 예상치 못한 몇 마디 짧은 말을
엉겹결에 흥흥 받고 빚을 지게 되었어
마음은 갚으려 해도
그게 쉽지 않더군

꽃 지고 잎도 지고 되풀이 빨라지고
서성거리다가 빚을 갚지 못하고
사람 참
어정쩡 싱거워지기
이래저래 쉽더군
(시집 ‘天池에서’, 문학아카데미, 1994)

[시의 눈]

세상 빚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요. 오다가다 신세 졌거나, 언짢아 기분 내키는 대로 뱉다가 한동안 수습하지 못한 채 지나가지요. 그와 술한잔 해야지 하다 또 몇 년을 보냅니다. 허허, 어정쩡, ‘꽃 지고 잎도 지’는 동안 결국 흐지부지 끝나버리지요. 3년 전, 최 교수님을 뵈었어요. 전주 맛집에서 덕담에 이어 고하문학관에서 강의해 주셨지요. 최근 작고하셨단 부음에, 주신 시집들을 펴 보았습니다. ‘1995년 새봄’이라 쓴, 시집 두권을 내 학위기념으로 사인해 주셨네요. 아, 기억에 밀려난 선생님, 시처럼 그만 싱겁게 보내버렸습니다. 책갈피엔 먼지조차 희미해졌군요. 그랜드호텔 골목 감자탕집에서 듣던 고담준론, 순간 나는 ‘어정쩡’에서 헤어나 싱거워지려는 한 친구의 번호부터 호명합니다. 최승범(1931-2023) 시인은 남원 출생으로 전북대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1969년 ‘전북문학’을 창간해 지금껏 펴냈습니다. 시집 ‘蘭 앞에서’(1992), ‘자연의 독백’(1998), ‘대나무에게’(2013) 등이 있고, 다수 수필문학연구서가 있습니다. 그는 이 땅의 풍류와 맛의 정신을 멋지게 구현한 시인으로 정림(靜林), 그 화엄삼매 속에 있습니다.<노창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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