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정월 대보름날의 산책 / 수필 강성남 |
| 2023년 02월 13일(월) 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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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쯤엔 계수나무와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를 연상케 하는 정월 대보름이 있다. 그 고향 어귀에 들어서면 감추지 않은 나신처럼 매끈한 당산나무가 있다. 그러한 것들이 눈앞에 시원하게 나타나 푸르름을 선물할 것만 같은 아침이다. 마침 일요일이고 하여 고향마을을 둘러보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오늘은 하늘조차도 비취색이다. 겨울철이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그것도 대보름 하루 전 하늘의 파란색은 풍요를 안겨준다 했다. 큰 보름이라는 ‘정월 대보름’은 구정 명절, 추석과 함께 대표적인 우리의 명절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성장한 나에게는 정월 대보름날만 되면 고향마을이 매우 그리워진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마을회관 앞 큰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대보름 놀이를 하는데, 그중에서도 마당 한가운데에다 멍석을 펼쳐놓고 하는 윷놀이가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 멍석 위에 윷가락 던질 때마다 함성이 터져 나오고, 웃음소리 왁자지껄했다. 윷놀이 판 옆 구석 자리에선 동네 꼬마들의 팽이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등이 벌어지고,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사물놀이로 명절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회관 뒤편 큰 논배미에서는 동네 청년들이 대나무를 베어다 달집 만드느라 분주했다.
밤이 되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나와 달집 주변에 모여들었다. 별빛을 담고 반짝이는 야경이 한껏 고조되면, 새끼줄을 둘러치고 창호지엔 각 가정의 소원성취 소지를 새끼줄에 끼운다. 이장님과 반장님이 달집에 불을 붙이면 환한 불빛과 함께 행운을 빌고, 액운은 불과 함께 하늘로 띄워 보낸다.
마을회관 앞마당에 일제히 함성이 울려 퍼지면 보름달과 달집 불이 어우러진 동네 사람들 얼굴에는 발그스레한 웃음꽃이 만발하고, 저 멀리 논두렁 밭두렁 밤하늘엔 우주쇼보다 더 실감 나는 쥐불놀이가 펼쳐진다. 그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내 더위 사가라”고 외치던 더위팔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더위팔기의 절정은 잣, 호두, 밤, 은행 등을 껍질째 깨물면서 ‘일 년 열두 달 무사태평하고 부스럼, 뾰루지 하나 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로 시작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러한 미풍양속이었던 건강 축원과 ‘부럼 깨물기’ 등은 예전에는 자주 볼 수 있었던 풍속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60년대 초 초등학생 시절, 봄방학을 앞둔 대보름날이면 많은 친구들이 학교에 부럼을 가져와 돌멩이로 깨던 친구들의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떠오른다.
다행히도 정월 대보름날이면 내 고향 시골 마을에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유일한 풍습 하나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조상신께서 마을을 지켜주고 사람을 지켜주라고 비는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에 금줄을 치는 풍습이다. 당산나무에 금줄을 칠 때 보름달 곁으로 수많은 별무리들이 장난스레 별똥을 싸놓기 시작하면 당산나무 아래 모두 모여 두 손을 모으던 그 모습에 한 줄의 설화가 피어나고 정결함이 묻어나고 상쾌한 일 년이 시작되었다.
그 풍습은 우리를 지상의 한 모퉁이에 모여 살아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공동체라는 소속감을 밝히고 이를 통해 사회 구성원이라는 큰 관계망 속에서 서로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는 곳으로 여겨지게 했다. 이러한 면모들이 서로가 함께해온 이웃이라는 큰 자산의 의미를 남겨주었다. 그러한 밑바탕하에 하나의 풍습과 하나의 인연은 고향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다. 그 고향이 있는 정월 대보름날에 검은 구름을 벗어내며 솟아오른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떠오른다.
이젠 수호신이 되어버린 저 당산나무의 기억 속에는 수천 년 전의 마한의 숨결이 담겨있고, 그 숨결을 간직하며 이어온 사람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당산나무 옆에서 나고 늙어가는 사람과 고향 떠나 돌아오지 못한 이의 저문 마음도 담겨있다. 왠지 오늘따라 겨울바람이 마을 어귀에 닿으면 당산나무는 보름달과 별들을 부르고, 먼 신화를 불러들이고, 하늘의 새와 물들이 노래를 부를 것만 같다.
내가 떠나온 고향에는 내 삶의 여정이란 긴 그림자를 품고 있다. 이러한 고향에 오면 올망졸망한 키와 불알의 굵기를 재며 키득키득 웃던 웃음소리가 들릴 것 같고, 뒷동산에 떠오른 보름달 속에서 뛰어놀던 까마득한 유년의 추억들이 떠오를 것만 같다. 달이 뜨는 동산은 바람에 펄럭이는 어머니의 널따란 옥양목 치마폭을 닮았으며, 구수한 두엄 냄새와 땀에 전 아버지의 듬직한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 마음도 보름달을 닮아간다. 터덕대며 고향마을을 뒤로한다. 시조 한 수가 읊어진다.
환이 뜬 밝은 달이 밤빛에 흐르는데
저 하늘 둥근달은 우리들의 마음인 양
훈훈한 마을의 정을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아
밤 깊어 고요한데 고향마을 보름달 되어
그리움을 토해내듯 사무치게 밝구나
달빛 속 고향의 고운 자태 떠올리고 있노라
-약력-
▲(사)한국문인협회 담양군지부장, 길문학, 동천문학 회장
▲현 담양문화원장
▲저서 : 동시집 ‘하얀 미소’, 동요집 ‘새싹’, 시집 ‘그리운 사람들’, 시조집 ‘흑백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