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보는 명화이야기]겸손(Humility) 자신을 낮추며 드러내지 않는 삶의 지혜 낮아질수록, 비워낼수록 더 커지는 감동과 삶의 향기

2023년 03월 09일(목) 18:41

피에트로 다 코르코다 作 ‘황금시대’ <위키피디아 검색>

겸손의 미덕은 늘 강조해도 모자르지 않은 일인 것 같다. 흔히 남 앞에서 자랑할 만한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잘난 척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보며 겸손하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겸손이라는 단어의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단 한자 겸(謙)자를 보면 손으로 두 개의 볏단을 잡은 형상 앞에 말씀 언(言)자가 붙은 모양새다. 다시 말해 볏단과 말을 한 손에 겸해 잡는다는 것인데, 고개를 숙인 벼와 말을 묶는다는 것은 침묵을 미덕으로 여겨야 한다는 뜻으로 전통적 행동규범이 글자 속에 함께 담겨 있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뒤에 글자 손(遜)도 쉬엄쉬엄 갈 ‘착’과 손자 ‘손’으로 구성됐는데, 이 글자로 인해 뒷세대로서 자손들이 해야 할 행동거지임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외에도 철학자 괴테는 “겸손은 타인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라 했고, 삶의 지혜가 담긴 책 탈무드에서는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과 겸손함”이라고 언급했다.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됐을까? 명화 속에 등장하는 겸손에 대해 살펴보며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에는 ‘부끄러움과 겸손, 염치의 신 아이도스’(Aidos)가 있다. 그녀는 인간에게 수치심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악을 통제했는데,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조금 독특한 점으로는 아이도스는 일반적으로 신화나 그림 속에 혼자 등장하지 않고 늘 누군가와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어떨 땐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의 딸로서 ‘그리스 비극’에 나타나기도 하며,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와 함께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정의의 여신 ‘디케’와 자매지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가장 강렬한 네메시스와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서적에서 인간의 시대를 다섯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그 시기는 가장 이상적이던 티탄족이 지배했던 ‘황금시대’, 올림포스의 신들이 세상을 지배했던 ‘은의 시대’, ‘청동시대’, ‘영웅시대’, 마지막 ‘철의 시대’까지로 구성돼 있다.

그중 가장 찬란했던 시기는 누가 뭐래도 ‘황금시대’이다. 이탈리아 바로크 시기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작품 ‘황금시대’를 보자. 그림 속에는 마치 에덴동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림에는 온통 사랑과 평화, 자연과의 동화, 더불어 따뜻한 색감까지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이다.

이 시기는 법 없이도 모든 사람이 서로를 믿고 살았을 만큼 정의로웠을 뿐만 아니라 동판에 새긴 위협적인 법률들을 읽을 필요도, 재판관의 입을 두려워할 일도 없었다. 또한 투구나 칼 그리고 군대가 없이도 평화롭게 살 수가 있어 도시 주변에 구덩이를 팔 필요도 없었다.

유명한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로렌초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와 함께 동시대를 경쟁했던 화가 코르토나는 로마 바로크 건축에 있어서도 중요 인물 중 하나였다.

로마와 피렌체에서 일했던 그는 건축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황금시대를 묘사한 작품을 봐도 바로크 특유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기법과 화가의 표현력 덕분에 더욱 황홀한 천국의 시간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안타깝지만 인간의 시대는 이 시기가 지나고서는 이들보다 형편없는 족속이라고 명시돼있는 ‘은의 시대’로 그리고 더욱 형편없는 청동시대로, 영웅시대로 계속해서 쇠퇴해가는 모습이 펼쳐진다. 그러다 마지막 철의 시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 시기를 지나며 인간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철의 종족은 최악의 종족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욕하며 전쟁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주먹을 휘두르며 다른 이의 도시를 파괴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도 없고 정의는 오로지 주먹과 칼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헤시오도스는 이 부분에서 “철의 시대에는 염치의 여신 아이도스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마저도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하얀 옷으로 감싼 채 넓은 길이 나 있는 대지를 출발하여 인간을 떠나 신들과 합류하기 위해 올림포스산으로 올라가 버릴 것”이라며 두 여신을 언급한다.

이들이 사라진 시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겠는가. 이 두 여신이 사라짐으로 사람들은 서로가 어떤 짓을 하건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을 당해도 행복의 균형을 잡기 위해 대신 복수해 줄 이가 사라져 버린 그야말로 무법천지였을 것이다.

이런 시기가 왜 도래하게 됐을까? 일단은 황금시대와 가장 크게 비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답은 왜 네메시스와 아이도스가 인간 시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와도 매우 연관이 깊다고 하겠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가 그린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에는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오레스테이아’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복수의 여신들의 모습과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윌리암 아돌프 作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

내용인즉 트로이 전쟁의 총사령관이던 아가멤논이 출항을 위해 딸을 희생양으로 바치자 그의 아내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그를 죽인다. 이어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며 복수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반복되는데, 망령이 된 어머니가 복수의 여신들을 깨워 아들을 괴롭히며 아들은 반미치광이가 돼버린다. 바로 이 장면이 묘사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주로 친족 살해범을 추궁하던 또 다른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 자매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네메시스는 이보다 좀 더 큰 영역에서 ‘모든 지나친 행위’를 벌했다.

마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선 악의 구분 없이 분수를 넘어서는 모든 종류의 과도함을 응징’해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벌을 주어 균형을 잡는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정의의 여신 디케는 어떠한가? 한 손에는 저울을 또 다른 손엔 칼을 들고서 ‘공정한 법의 잣대’를 통해 상대가 누가 되었건 예외 없이 잘잘못에 대해 정의를 심판한다는 말 그대로 정의로운 여신이다. 이처럼 원초적 정의라 할 수 있는 복수의 여신 그리고 공권력이 확보해 준 정돈된 정의라 할 수 있는 디케 여신 둘 다 늘 겸손의 여신과 함께한다. 다시 말해 기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상의 나팔꽃을 본 적이 있을까? 자신을 뽐내기 바쁜 꽃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양을 보면 약간 의아하기도 하지만 그 곁의 향기는 여느 꽃을 무시 못 할 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향기는 꽃을 찾은 꿀벌과 사람들을 한동안 혹은 오래도록 그 곁에서 머물게 하고 따르게 만든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타인의 마음을 얻을 만큼 훌륭한 지혜라 언급되는 겸손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도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글을 맺는다.

<이현남·전남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