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서설 / 김휼

2023년 03월 12일(일) 19:08

김휼

달을 지나는 시간은 길기만 합니다
어깨를 기대오던 슬픔을 소금물에 재워두는 것 같은,
상처는 부력을 얻어 그쯤 어디에서 단단해지기도 하겠지만
독 안에 고인 채 깊어지는 속울음
상징처럼 띄워놓은 고명들이 쓸쓸한 낯빛으로 밀려드는
불안을 지키기도 했을까요
고요한 수면에 비친 당신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고이던 울음은 깊이를 더해야 했습니다
설익은 감정의 알갱이들이 축척된 침묵을 빚어내는 동안
거무스름하게 익어가는 어둠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반짝이는 순간을 만나게 될는지
발효되는 그리움의 서설이 길기만 합니다
(시집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현대시, 2022)

[시의 눈]

뒤의 에피소드를 맨 앞에 둘 때가 있지요. 난 그 이야기 담을 큰 독을 오래전에 들여놓았어요. 뭐 어머니 유품이지만요. 독에 빗물이 찹니다. 들여다보면 그는 뭐하러 왔냐는 듯 빤히 꾸짖습니다. 어둠을 붓에다 묻혀냅니다. 독의 서설을 시작할까 해서지요. 근데 헉, 구렁이로 그가 노려봅니다. 어느 유년 때 하교길에 배고파 산밭 고구마서릴 좀 했습지요. 길 건너 아주머니가 쫓아와 날 영창에 쳐넣는다 쥑인다 야단이었네요. 난 그만 어머니가 아낀 빈 독에 숨었다가 놀래켜 뛰쳐나왔습니다. 지금도 그 선애댁이 막 쫓아온다니깐요. 무서운 꿈에 서설은 엄두도 못내지요. 더 늙은 발효의 때를 기다려야 할 동화 같아요. 김휼 시인은 장성에서 나, 2007년 기독공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말에서 멀어지는 순간’(2023)을 냈습니다. 그는 상처 흉터에 점자 같은 밀밀 타투법의 시어로 조사하는 젊은 시인이지요.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