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숙자의 '작은 학교이야기']이 시대 평범하고도 위대한 시민 고흥점암중앙중학교 교장 |
| 2023년 04월 13일(목)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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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살이도 그러할진데 사람살이는 더 말할 것이 없다. 내친김에 내 몫으로 분양받은 땅에 씨감자를 심었다. 감자 농사는 씨를 뿌리거나 순을 심는 것과 달리 제살을 쪼개어 심는다. 제 스스로 씨앗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땅 속에 심겨진 감자씨앗은 40-50여일이 지난 뒤 두 세 차례 흙으로 북돋아 주어야 꽃도 피우고 흙 속에서 주렁주렁 알맹이가 열린다. 텃밭에서 쭈그리고 감자를 심고 들어온 직후 60대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가학리에 사는 주민이란다. 민원인 줄 알고 내심 긴장하고 있는 내게 웬 봉투를 내민다. 그 봉투엔 ‘항상 고맙고 감사합니다’라는 손글씨가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부임 후 장학금 기부자 명단을 살펴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기부자가 동문과 지역의 기업체, 청년회, 종교단체였다. 그 중 동문도 아닌 지역의 한 농민이 1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기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동문도 아닌 지역민이 어떻게 이렇게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줄 수 있을까 싶어서 찾아 뵙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행정실장에게 연락처를 물어보니 기부자 성명이 이삼순님이라는 것만 알 뿐 연락처도 사는 곳도 가르쳐주지 않아 그분이 오지 않는 이상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해서 혹여 기부자가 학교 오면 반드시 교장실로 모시고 오라고 당부해 둔 일이 있었다. 바로 그분이 오셨던 것이다.
그분에게 조심스럽게 장학금을 기부하게 된 사연을 여쭤보았다. ‘이삼순 장학금’은 고인이 된 이삼순님의 남편이 시작했고 지금은 자신이 그 뜻을 이어 중학교와 노인회에 기부하고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삼순님의 남편은 1980년대 초반 농민수당 쟁취며, 수세거부 투쟁 선봉에 섰던 농민운동가 고(故) 박주순님이었다. 남편은 과역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점암면에서 농사를 지었고 자녀들도 점암중앙중학교를 졸업해 건실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까닭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남편은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의 공교육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해서 자녀들도 공교육보다는 홈스쿨링하기를 원했지만 이삼순님은 정권이 아무리 부정적이라 해도 그 속에서 피워낼 희망도 학교라는 장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부부싸움 끝에 자녀들의 학교교육을 얻어낼 수 있었다. 자녀들은 이런 사실을 모를 거라며 이삼순님은 웃는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6월 초여름 튼실한 열매를 맺어내는 하얀 감자꽃과 겹쳐 보였다.
대한민국은 오늘 세계 속의 빛나는 국가가 됐다. 설령 선진국이 됐다하더라도 모든 국민이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빛이 큰 만큼 그림자도 커다랗게 드리워져 있다. 인구 절벽도 청년실업도, 저출산의 문제도 모두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결혼을 꺼리고 양육과 교육문제로 아이를 낳지 않는다. ‘교육’과 ‘양육’을 국가가 책임진다면 어떨까.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이삼순님이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 곳곳엔 이삼순님들이 많다. 모교의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동문들, 이들이야말로 우리사회의 꽃을 피울 씨앗이다. 그리고 ‘평범하고도 위대한 시민들’이다. 그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머잖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라 생각한다. 지면을 빌어 감사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