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대 칼럼]고창 청보리길에서의 역사 생각 시사평론가

2023년 04월 20일(목) 19:25

주말마다 고창에서 걷기를 하는 모임이 있다. 거기 초대를 받아 지난 주말 고창에 다녀왔다. 걷기는 가장 기초적인 운동이면서도 다른 운동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걷는 것은 원초적인 즐거움을 준다. 고창은 행정구역상 전북에 속해 있지만 생활권은 광주권역이다. 전북 행정 중심지인 전주에 가는 것보다 광주에 가는 것이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주에서 차로 30여 분만에 고창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차창 밖 풍경은 황홀했다. 간간이 내리는 비에 산자락과 들녘이 별천지였다. 마치 안개가 어슴프레 어우러져 매우 매력적이었다.

고창에 도착해 두 시간여에 걸쳐 고창 일대를 걷다가 보리밭과 유채꽃이 장관을 이루는 어느 장소에 이르렀다. 마침 고창군이 자랑하는 청보리 축제가 시작하는 날이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방문해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했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늦은 벚꽃이 비처럼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가끔 꺼내 보게 될 사진들은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안을 줄 것이 틀림없다. 고창은 황홀한 풍경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풍경의 끝에 가슴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격변기에 조선을 휩쓸었던 농민항쟁의 역사가 고창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걷던 도중 술암제에 이르렀다. 술암제는 녹두장군 전봉준과 함께 선운사에서 구국안민을 맹세한 동학 접주 중의 한 분인 배환정을 위해 그의 손자가 1943년에 지은 제각이다.

고창은 그 지형이 특이하다. 보통 높고 낮은 산들과 그 틈새로 작은 평야가 이어지는 다른 지역과 달리 고창은 낮은 구릉지가 한없이 이어지는 독특한 모양새다. 원래는 야산이었던 곳을 개간해 구릉지의 논밭으로 일궜다는 설이 있다. 고창의 이런 독특한 지형은 고대로부터 높은 농업생산성의 기반이 됐을 것이다. 고창지역에서 수없이 발견되는 고인돌이 그 증거다. 높은 농업생산성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누구나 욕심내는 땅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만큼 억압과 수탈의 대상이 되었을 것은 불문가지다. 봉건적 농업사회였던 조선에서 그 양태는 극명했다. 정치가 문란해지자 가장 비옥한 땅이 먼저 수탈을 입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만약 한반도가 고창과 같이 구릉지로 모두 이어지는 지형이었다면 한반도는 고대 로마와 같은 대제국이 됐을 것이다. 로마는 반도의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시작해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주변으로 뻗어나가 대제국을 형성했다. 로마 문명은 오늘날까지도 유럽 문명의 주요한 뿌리가 됐으며, 근대 이후로 세계 문명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한반도는 산이 7할이고, 평지가 3할을 차지하는 지형으로 인근에 자리한 거대한 중원 제국의 압박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에 걸쳐 그 정체성을 이어오는 저력을 과시했다. 한반도의 남에서 북으로 마치 갈비뼈를 연상시키듯 겹겹이 이어지는 산들은 물고기의 비늘과 같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 때문에 역사상 수없이 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마침내 그 정체성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3할에 불과한 평지는 거대한 농업생산성을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반도와 달리 이탈리아반도는 고창이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게 대부분 구릉과 구릉으로 이어지는 지형이다. 이 드넓은 평야 지대에서 이들은 농사를 짓고 말을 달리며 거대 제국을 일궜다.

대제국을 일군 민족들이 승자의 저주에 휘말려 역사적으로 커다란 시련을 겪으며 명멸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한반도를 굳건히 지키면서 시련 속에서도 역사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끈질기게 이어온 역사적 정체성을 이제 발전적으로 승화하여 세계 문명 속에서 새로이 꽃피워야 하는 일이다. 적잖은 어려움이 산재해있다. 그러나 정치를 바로 세운다면 가능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몰려오는 여러 도전을 지혜롭게 응전하고 극복한다면 더욱 빛나는 도약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