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속 마주한 인간 존재의 고독함 그림 그리는 소설가 하일지 ‘순례자들의 예감’展…12일까지 갤러리생각상자 최명진 기자

2023년 04월 30일(일) 18:55

하일지 작가가 전시가 열리고 있는 갤러리생각상자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인생사 그 자체가 순례길이라고 생각해요. 삶의 국면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그림 그리는 소설가 하일지 개인전 ‘순례자들의 예감’이 오는 12일까지 갤러리생각상자에서 열린다.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나무와 거대한 돌 시리즈’부터 가장 최근 시리즈인 ‘1986년 여름 포르투갈에서’까지 끊임없이 변해오고 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는 강렬한 색감과 창의적인 작품성을 바탕으로 시적인 영감을 떠오르게 하는 많은 작품들을 그려냈다.

“자기복제를 늘 주의하면서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펼쳐가고 있는 중입니다. 시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철학적이면서도 독창적인 그림들을 그리려고 노력합니다. 보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요.”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다양한 시리즈 중 ‘순례자’, ‘녹색시대’, ‘1986년 여름 포르투갈에서’ 시리즈 총 26점을 골고루 선보인다.

‘순례자’

시계를 등에 지고 길 위에 서 있는 인물들은 유람선이나 비행기, 기차 등 이동수단과 낯선 이국 땅에서의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고 스스로 흔들리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해도 이 ‘순례자’의 여행은 ‘우연’이라는 길에 가로막힌다. 이 ‘우연’은 자연의 식물이나 거센 파도 숲, 대지, 나체의 여인, 꽃을 파는 과부 등으로 표현된다.

담쟁이덩굴로 둘러싸인 화면은 우리 삶을 침범하는 무의식 속 불안감을 나타낸다. 이 초록색 식물은 달리는 기차와 거대한 배, 사람의 몸, 살고 있는 집 내부까지 뒤덮는다. 특히, ‘순례자’ 시리즈는 작가가 1993년도 미국에서 출판한 시집 ‘시계들의 푸른 명상’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제도적인 미술 창작에서 벗어난 그만의 기발한 작품세계가 돋보인다.

그림 속 ‘시계’는 마음 속 무언가를 늘 소중하게 여기며 무언가를 메고 긴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네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유한한 시간을 지고 떠난 등장인물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며, 보는 이의 무의식에 저장된 이야기를 끌어낸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꽃을 파는 ‘1986년 여름 포르투갈에서’ 시리즈는 토속적이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며, ‘녹색시대’ 시리즈에서는 인간 존재의 고독함과 함께 작가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제 그림은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다른 구도와 화면 구성, 무엇보다 우리가 잃어버린 서사를 찾을 수 있게 합니다. 우리 누구나 ‘느낌’을 갖고 있잖아요. 현대미술이라는 건 우리의 잠들었던 감각을 일깨우는 데 주안점을 둡니다. 관람객들이 무의식 속 숨겨진 감각을 찾아냈으면 해요. 그리고 그 감각이 되살아나는 그때 비로소 우리가 바라보는 그림은 그 의미를 되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