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어르신 계절 / 권애숙

2023년 06월 25일(일) 19:51

권애숙

까무룩
저물고 있는
처연한 저 몸 한 채
꽁꽁 언
허공 길을
맨발로 밟고 서서
저리도 머뭇거린다
못 떨어낸
한세상
(시조집 ‘첫눈이라는 아해’, 시인동네, 2023.)

[시의 눈]

기자가 한 ‘어르신’을 인터뷰합니다. 총알이 관통하고 지나간 흔적을 보여줍니다. 70여 년을 숨겨온 상처라 합니다. 낮엔 경찰에 문초당하고 밤엔 빨치산에 몰리며 공포에 떨다 결국 부모 형제가 몰살당했습니다. 어린 그는 어찌어찌 살아남았다군요. 전쟁이 끝난 후 살해는 끊이지 않았답니다. 동네 앞 야산, 그때 처형한 사람들의 삭은 뼈들 사이 카메라가 돕니다. 어르신의 ‘못 떨어낸 한세상’은 ‘꽁꽁 언’ 기억을 붙들고 있습니다. 가족의 죽임, 그 공포를 무정한 세월에 맡겨 잊으려도 했다네요. ‘까무룩 저물고 있는’ 지금 ‘한 채’의 몸을 당시 총칼 앞에 던져 부모님을 저 세상에서라도 만났더라면 하는 기막힌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보는 이의 흘린 눈물조차 말립니다. 어르신은 갈라진 ‘맨발’로 땅을 질끈 딛으며 절단된 뭉텅 손으로 가슴을 칩니다. 아, 어찌 우리 잊으랴. 참으로 참으로 잔인한 ‘계절’입니다. 권애숙 시인은 경북 선산에서 나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와, 1995년 ‘현대시’ 시로 등단했습니다. 시집 ‘카툰 세상’(2000), ‘흔적극장’(2018) 등을 펴냈습니다. 그는 삶의 이정표가 스스로 전략과 몸짓을 반짝이는 철학적 사유와 만나게 하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