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아름다운 퇴장,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수필 - 서순초
2023년 06월 26일(월) 19:57
잠 못 이뤄 뒤척이는 밤, 무심코 TV 채널을 눌렀다. 눈에 익은 백전노장의 가수께서 청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관중은 기립 박수로 환호했고 백발의 청춘은 그 특유의 제스처로 무대를 휘어잡고 있는 중이었다. 과연 반세기를 풍미했던 ‘살아있는 전설’답게 카리스마 넘치는 장면이었다. 노래 중간중간 지나온 세월들을 곁들이며 살아온 날의 소회(所懷)를 풀어 놓은 그의 얼굴은 여유로움과 아쉬움과 쓸쓸함으로 깊은 눈이 더욱 깊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만류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손사래를 치며 당당히 무대 위에서 내려 올 결심을 한 그분의 이별 콘서트를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좀 많이 아팠고, 천천히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편한 요즘이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제대로 걷지를 못하며 제대로 못 먹는 동안, 어느새 절기가 바뀌었다. 이렇게 오래, 이렇게 호되게 아픈 적은 없었다. 무슨 신호일까. 느닷없이 성성한 사람을 연타로 내려치는 까닭은. 한 달 안에 무려 세 번씩이나 수술대 위에 눕혀버린 그분의 숨은 의도가 분명 있음이라. 축 처져 있는 육신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붕대로 칭칭 감아 매달아 놓은 두 발이 무언의 시위를 하듯 내 시선 위에 머무른다. 그래, 무던히도 많이 써먹었다. 발병이 날 만도 하지. 입담 좋은 내 친구의 말마따나 이 날수를 살면서 자동차 바퀴 한 개도 못 굴린 위인이 어디든 부르면 달려갔고 가 봐야 할 곳이면 그 누가 말려도 기어코 가버려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다만 마음 안에 찜찜한 부분이 있다. 거칠 것 없이 달려왔던 긴 여정에 분명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그 마지노선을 본의 아니게 넘어서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혹여 생채기를 내지는 않았는지. 무슨 일을 행함에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 교만과 독선의 칼을 휘두르지 않았는지 시방 가만히 돌아볼 일이다. 특히 ‘욱’하는 급한 성격 탓에 공든 탑이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린 상대방의 비명을 방관하지는 않았는지.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누워있으니 지나간 별별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흑백 사진으로 여과 없이 넘어가는 크고 작은 내 삶의 편린들. 마치 퍼즐을 맞추듯 가닥가닥 들춰가며 맞춰본다. 때 늦은 회한이 가슴을 후빈다. 진정 내 인생의 가을은 이미 만추를 지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는데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지막 남은 열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큰 울림으로 내게 이르신 말씀. “이제 그만 쉬어라, 그리고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하신다. 나는 순간 고개를 떨궜다. 갑자기 맥이 풀렸다. 그리고 사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였다.

‘그렇습니다. 기꺼이 내려놓겠습니다. 이제껏 서 푼어치도 안 된 욕망을 부둥켜안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리석게도 무엇을 비울까 보다는 무엇을 담아갈까 아직도 두리번거렸습니다. 하나를 담으면 다른 하나를 덜어내며 내려놓아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서서히 내려놓는 연습을 하겠습니다. 자식도 남편도 형제도 그리고 내가 붙들고 놓지 못했던 모든 것에서 이제 그만 자유를 선언합니다. 항상 젊은 청춘인 줄 알고 촐랑댔던 시간들을 이제 반납합니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렵겠지만 이제는 비워야 할 때. 반생을 대중 앞에 서서 갈채를 받았던 저 가수께서 아름다운 퇴장을 위해, 박수 칠 때 서둘러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나는 마치 고해소(告解所) 안에서 성사(聖事)를 보듯 구구절절 뇌까리고 나니 가슴이 한결 트이고 후련해졌다. 모처럼 누워있는 동안 많은 것을 찾았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난 시간이었고. 내 안의 장벽을 허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화해의 몸짓이기도 했다. 이제야 알았다. 두 발과 목을 묶어 둔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 느닷없이 침대에 눕힌 그분의 깊은 뜻을.

<서순초 약력>
▲‘수필과 비평’ 등단(1992)
▲대한문학상, 황희문화예술상 수상
▲저서 ‘꽃들의 반란’, 공저 ‘우리들의 사랑법’
▲현 광주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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