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이삿짐 / 박화남

2023년 07월 16일(일) 19:17

박화남

낡고 묵은 내 정신을 어디에다 둬야 하나
페이지 옮겨봐도 놓을 자리가 없다
빼곡한 시집 옆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칸칸의 기억마다 백지를 꺼내놓고
새로 써 본 고백은
읽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둘둘 말아서
햇볕에 내놓았다
(시집 ‘맨발에게’, 작가, 2023.)

[시의 눈]

마침 이삿짐을 싸는 오후입니다. 탑차 기사는 ‘짐은 빠짐없이 실었지요?’ 포고령 투로 말합니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밧줄로 조이면 끝이군요’ 무슨 형집행자처럼 선고합니다. 한데, 아내에게 숨겨온 ‘낡고’ 헐렁한 뭉치가 문제로군요. ‘빼곡한 시집’들 사이에 다시 둘까 하다, 에라, ‘둘둘 말아서’ 버려질 화장대에 밀어 넣습니다. 매립지로 이사갈 이 시나부랭이는 대학 다닐 때 ‘칸칸의 기억’들을 썼던 거지요. 보물단지도 아닌데, 아내의 주장을 어기고 세간을 옮길 때마다 버리질 못했군요. 하지만 임무 끝낸 밀정의 권총처럼 이제 버립니다. 서툰 내 삶을 증명할, 최후 목숨을 장식할지도 모를, 그 미련한 미련들을 낡은 글자에 햇볕처럼 얹어보지요. 참, 부질없고 민망한 일이지만요. 박화남 시인은 경북 김천에서 나, 2015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해, 시집 ‘황제펭귄’(2020)을 펴냈습니다. 그는 사물과 인생에 스민 담론들을 순간 끄집어내 독자에게 소통시키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