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몽당연필 / 박자경

2023년 10월 09일(월) 19:43

숱한 밤
베이고 깎인 몸

뼈 마디마디 먹물로 채우고
주저리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흔들리지 않는 목숨의 빛깔로
혼자만의 삶을 써 내려가다
성수대교 다릿발 삭아내리듯
골병들어 푸석한 내 어미처럼
꺽둑꺽둑 부서져도

시인이 되고
하느님이 되기도 하는
(시집 ‘물의 습성’, 문학들, 2023)

[시의 눈]

깊은 밤, 되지 않은 글을 또 쓰고 있지요. 이때면 책상지기 옆에 허리휜 어머니가 꼭 다녀가십니다. ‘주저리’ 가난한 이야기를, 하지만 나, 목숨의 빛깔보다 더 붉어진 삶을 쓰고 싶어요. 벅찬 농사에 ‘골병들어 푸석’해진 어머니의 그 꺾인 무릎이 몽당연필을 쥔 이 손가락 사이로 절뚝여 오십니다. 유모차라니요. 뭐 흔한 지팡이 하나 못 사드렸네요. 어머니는 괜찮다시며 아버지 지게 괴던 그 작대기를 짚고 밭이나 마실에 가시곤 했지요. 그게 삭아 부러질 때쯤엔 낫으로 잘 다듬어 ‘몽당연필’이듯 짧은 지팡이로 만드셨지요. 하면, 나도 댓가지 낀 연필을 썼을 무렵이군요. 외삼촌이 제대할 무렵 내 몽당이는 볼펜 대에 끼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구먼요. 지금도 낡은 나무필통엔 그게 여러 벌 있습니다. 덕분에 나도 시인이 되기는 했네요. 뭐 삼류지만요. 허, 이래 봬도 한때 어머니 앞에선 ‘하느님’ 같은 시인아들이었구먼요. 박자경 시인은 서울에서 나 2005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해, 시집 ‘오래 묵은 고요’(2010)와 시해설집 ‘쉼, 詩’(2021)를 냈습니다. 그는 사물에 대한 사유를 응축과 치환의 벼릿줄로 끌어내는 그 본질주의적 시학을 실천하는 시인입니다. <노창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