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지식의 이면 / 박미자

2023년 10월 15일(일) 19:00

그 방을 폭군인 양
십년을 점령했다

한둘씩 떠나보낸
책장 안쪽 둘러보니

퀴퀴한
곰팡이꽃이
문장 읽듯 피었구나
(시집 ‘바닷물 연고’, 작가, 2023)

[시의 눈]

작가란 서재의 노예, 아니 ‘폭군’이기도 합니다. 난 구식 아파트를 서재로 쓸 요량을 퇴임 후 가졌더랬습니다. 세 사는 할머니에 비워달라 폭군인 양 굴었지요. 그래, 리모델링한 서재를 한참 뻐기며 쓸 무렵 문인들이 다투어 와보고 내 폭군 노릇을 부러워들 했네요. 한데, 재개발 고지 벌써 3년 됐지요. 바로 들어간단 공사는 커녕 무슨 승인 절차가 늦었다며 낡은 채 저리 서 있네요. 난 쓸 자료가 필요하면 종종 여길 들르곤 해요. 그래 갈 때마다 폭군처럼 빼옵니다. 하지만 서가엔 ‘곰팡이꽃들’이 다투어 읽는 듯 싶습니다. 거실 윗칸 이문열 ‘삼국지’를 다 읽었는지 화난 장비의 얼굴이 함부로 그려졌네요. 셋째 칸 정비석 ‘소설작법’은 거미줄이 다 읽고, 옆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로 건너갔군요. 이은상의 ‘무상’, 한하운의 ‘보리 피리’, 이청준의 ‘이어도’엔 거르매가 읽는 중인가 봐요. 남도 땡볕 같은 형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나, 이들보다 먼저 읽어야겠다고, 트렁크 가득 세계문학전집을 털어 싣고 왔네요. 한데, 나도 참 매정했군요. 미물에게 읽을거리나마 줄 걸…, 뭐 문학은 꼭 인간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박미자 시인은 경북 영덕에 나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조집 ‘그해 겨울 강구항’(2013), ‘도시를 스캔하다’(2018) 등을 펴냈습니다. 그는 다양한 풍물의 존재적 좌표에 유의미한 곡선 시법을 적용하는 해양 시인입니다.<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