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의 '문화터치']해남은 더 이상 ‘땅끝’이 아니다

2023년 10월 19일(목) 19:56

광주문화재단 전문위원

고향,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고향의 산천도, 내가 살던 동네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건 누구라 할 것 없이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추억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거기에 다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보다도 더 젊은 엄마가 소리지르고 야단치면 도망가기 바빴다. 아마 숙제를 하지 못했거나 청소를 하지 않는 등 소소한 잘못이었을 게다. 그렇게 도망갔다가 해질 녁 돌아오면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해 놓고 기다렸다. 친구들과 뛰놀던 동네 골목이 손에 잡힐 듯 아스라하다. 나는 어렸고, 엄마는 청춘이었던 그 시절이 정말 그립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고향은 땅 끝 해남이다. 어렸을 땐 그곳이 땅의 끝인지, 시작인지 모르고 살았더랬다. 나중에 객지에 나와 보니 ‘땅끝’이라고 불렸었더랬다. 그냥 땅의 끝이나 보다 하고 여겼었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벌써 40년이 훌쩍 지났으니 말이다. 적잖이 복잡 다단한 삶의 터널을 복닥이며 헤쳐 나왔다. 거기서 느낀 것, 끝이라고 시작했던 지점에서 새로운 시작의 씨앗이 움튼다는 사실이다. 명리로는 그걸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고도 한다. 낭떠러지여서 떨어져 죽을 줄 알았더니 새로운 길이 생겨 살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그 얼마나 그런 순간이 많았는지. 그건 나만의 일이 아닐 게다. 이 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터이다.

인생은 항상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란 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터득하였다.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윷놀이에서도 ‘백도’가 있지 않은가. 쭉쭉 앞으로 가다가 느닷없이 ‘뒤로 돌아가’로 변하기도 한다. 지형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돌려놓고 보면 끝은 끝이 아닌 시작점으로 변한다. 그동안 우리는 해남이 땅 끝인 줄 알았었다. 그랬는데 아니다. 지도를 뒤집었더니 해남은 한반도의 끝이 아니라 유라시아로 나가는 시작점으로 변한다. 더욱이 이상기후로 빙하가 녹아내리는 비상의 시점이다. 지구온난화를 최대한 방어해야 하는 게 이 시대 지구인으로서의 의무다. 그러나 북극해가 열린다면 그에 대한 대처도 해야 한다. 그 비상의 시기에 해남은 한반도의 시작점이고 유라시아로 가는 출발점으로서의 역할이 톡톡히 기대되는 땅이다.

해남을 떠나와서 해남을 바라보니 물리적 거리로 해남이 멀긴 멀다. 내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도 멀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보면 정말 끄트머리로 느껴진다. 가히 유배지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황이다. 이제는 판이 바뀌고 있다. 태평양시대가 저물고 북극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북극시대를 여는 출발지는 다름 아닌 해남이다. 해남이 그 출발점이다. 그 누구든, 더 이상 해남을 땅 끝이라고 부르지 마시라. 대한민국의 기상을 펼칠 좋은 기운을 품고 있는 땅, 해남은 향후 광대무변의 세계를 품어낼 것이다. 그게 틀림없다. 21세기가 그걸 원하고 있다.

고향에 가면 추억 속의 젊은 엄마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자주 오지 않는 딸을 반갑게 맞는다. ‘니 얼굴 잊어먹겠다’며 서운해 하시면서도 일단 온 것에 대한 반가움을 더 크게 표현해주신다. 뒤늦게 철이 들어선지 엄마와 고향에 대해 더 애틋해진다. 엄마가 살아계셔서 한번이라도 더 찾게 된다. 엄마는 오래오래 살아주시면 고맙겠고 해남은 땅끝이 아니라 땅의 시작점으로 그 웅대한 비전을 세우면 좋겠다. 세계로 웅비하는 한반도에 용틀임하는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상서로운 역할이 기대되는 땅이다. 그 일을 해남이 서서히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북극해 시대, 해남은 한반도의 지기를 모아서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자 비상탈출구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는다. 내 고향, 해남은 그런 저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