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동네 세 집의 풍경 / 천세진 |
| 2023년 10월 22일(일)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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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의 역사가 스민 공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인상 깊은 일이었지만, 세 집이 동일하게 농업 기반의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식과 풍모에서는 각각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그랬다. 어느 문화권이든 집의 크기는 경제적 영향을 받아들인 흔적이다. 한 집안의 경제적 규모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경제적 규모도 집의 크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집의 구조도 사회경제적 상황을 읽게 해준다. 조씨댁에서 보았던 사무 공간과 도정시설의 존재가 그랬다. 부의 원천이 농업(쌀)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시설이다.
정도는 달랐지만, 세 집에서 시대 상황에 따른 변화가 발견됐다. 집이 달라지는 것은 경제적 영향만이 아니다. 사회문화적 영향과 주인의 미학적 심상 또한 집의 양식에 작용한다. 세 집이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진 것이 그 증거들이다. 집은 탄생 당시에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외부의 영향을 계속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조씨댁의 집의 처마 한 곳에 일본 신사식 장식이 덧대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좋든 싫든 지배자들의 문화적 요소들이 침투할 수밖에 없다. 그 증거가 대가(大家)의 한 구석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사회적 변화에 대응한 점도 흥미로웠다. 조씨댁의 경우 부침 잦은 한국의 상황 때문에 자식들 공동명의로 집을 남겼는데,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는 상황이 집에 대한 관심을 낮췄고, 결과적으로는 집의 고풍스러운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조씨댁에서 만난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집안의 담장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데 비해, 김씨댁에서는 본채와 사랑채 사이를 나누고 있었던 집 안 담장의 상당 부분이 시멘트 블록으로 바뀌어 옛 모습이 훼손돼 있었다. 보수 과정에서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문화재 복원과 보수에 대한 진중한 사유와 실력이 부족했던 시절의 무지가 낳은 기괴함이었다.
이씨댁의 경우는 또 달랐다. 원불교에 희사한 공간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었지만, 다른 채들은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의 부침을 견디지 못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세 집 중 두드러지게 현대식 가옥으로 바뀐 것도 있었다. 오래된 공간과 일상이 맺는 관계가 세 집 마다 달랐고, 어느 집에서는 결코 순탄치 않은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원형을 유지한 것은 잘한 일이고, 유지하지 못한 것은 잘못한 일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변화를 무시한 삶은 훌륭한 삶이고, 변화에 따른 삶은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접근이라면 서울은 잘못된 문화의 본산이다.
함라의 세 집은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 세 집의 존재를 통해 한때 익산의 산업(농경) 구조가 대단한 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고, 세 집안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시대변화에 대한 대응이 주거 건축물에 다양한 문화적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현재 한국인들 대부분이 살고 있는 주거공간도 마찬가지다. 한 집의 형태와 부침이 아니라, 도시 및 국가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사유와 문화적 방향을 설정하고 있어야만 지난 시대의 건축물들에 남겨진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지킬 수 있다.
모든 건축물은 문화적 기억을 품고 있다. 건축물에 일단 변형이 가해지고 훼손이 일어나면 복원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 해도 되돌리기 어렵다. 복원이 이루어져도 문화적 기억은 이미 부서진 후다. 건축물에 뭔가를 덧대는 일조차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건축물을 변형시키고 훼손한 사유는 건축물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문화적 사물들에 적용되고 보이지 않은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건축물에 남은 흔적이 그나마 눈에 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