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희망빌라 / 이지수

2023년 10월 22일(일) 19:10

설레는 마음으로 움틀 때는 몰랐다
비바람에 시달리다 멍들어도 참았다
세상은 나만 잘하면 잘될 거라 믿었다

언제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잔가지 흔들릴 때 움켜잡던 뿌리 저편
비수기 권고사직에 쏠려 가는 환한 꿈들

얄팍한 월급에도 삼겹살 굽던 저녁
내게도 그런 날 다시 올 수 있겠지
하나둘
불이 켜지는
단풍나무 옆 희망빌라

(시조집 ‘같이 울던 저녁놀’, 책만드는집, 2023)

[시의 눈]

어느 반도국의 동네에 빌라와 신·구아파트가 촘촘 들어섰습니다. 개발 초 지어진 ‘선망(先望)’ 맨션이 가운데 있었지요. 한데, 그 주변 땅을 사들여 짓다가 그만 ‘낙망(落望)’ 아파트가 된 무량공법 건축물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다 지어놓고도 무너져버린 ‘무망(無望)’ 아파트도 있지요. 건설사 간부들이 도망해버렸는지 지금은 흉물포대기만 찬바람에 날립니다. 아이들 말에 의하면 그곳을 ‘도망(逃亡)’ 아파트라고도 해요. 한데, 안타깝게도 어제 고시촌 빌딩에선 한 젊은이가 또 몸을 던졌답니다. 벌써 세 번째라네요. 고시생들 사이에 ‘절망(絶望)’ 고시텔이라 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참, 그 한 블럭 건너, 가을 단풍나무가 저리 고운 옆에 ‘희망(希望)’ 빌라가 다 있네요. 쥐꼬리 월급이나마 받는 날 이곳 사람들은 삼겹살 구울 생각으로 부푼답니다. 허어, 그 냄새만큼은 부자처럼 잔치를 꿈꾸는 ‘부망(富望)’ 빌라이겠네요. 나, 마침 소주 생각이 나지만 생략하지요. 술 깨면 그 ‘희망’조차 없어질까 해서랍니다. 이지수 시인은 경기 파주에 나 2019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습니다. 그는 현대사회의 모순들을 시에 담아 거기 위무를 불어넣는 온기의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