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을 여는 詩]나무의 발 / 원구식 |
| 2023년 11월 19일(일) 1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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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이 죽음의 끝이고
그 끝이 쾌락의 시작이다.
그리하여, 나무는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시집 ‘오리진’, 한국문연, 2023)
[시의 눈]
한 오백 년쯤 달려온 정자각 지기 팽나무가 생각납니다. 딛는 발소리 또한 맘모스처럼 쿵쿵 요란했습니다. 비바람 속 도깨비불이 걸리는 여름밤이면 난 이불 속으로 숨었더랬지요. 아마 우크라이나 자포리즈히아를 점령한 러시아 탱크의 무쇠 발톱보다 더 우람했겠지요. 큰 나무도 한톨 싹일 땐 그 어미가 뱉은 씨앗을 죽이고서 일어섭니다. 그가 꿈꾸는 최후란 한옥 같은 집채나 그 안의 맞춤가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겠지요. 한데, 어떤 나무는 다비식으로 초대됩니다. 그는 화염의 화려한 오르가슴에 이르다가 정액 같은 송진을 다 쏟고서 사리숯덩이로 남습니다. 그 나무의 세월이 주먹발 힘으로 제 몸을 흔듭니다. 아니, 달리고 있었네요.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난 천천히 가야겠어요. 칼바람이 뜰의 마로니에 나뭇잎을 다 쳐낼 듯 퍼렇습니다. 이제 겨울 문턱인가 봐요. 나무에 짚버선을 신기는 관리인들이 부산합니다. 그가 더 달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겠지요. 거리아가씨들 카카오택시를 부르지만 난 손사래를 칩니다. 달리고 싶지 않아요. 나무발 대신 하늘발로 제자리걷기만 하면 안 될까요. 원구식 시인은 경기 연천에서 나,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 ‘먼지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1992), ‘마돈나를 위하여’(2007), ‘비’(2015) 등을 펴냈습니다. 그는 소멸 부재하는 존재에 대하여 풍자의 시니컬한 칼로 자조적인 무늬를 오려내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