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을 여는 詩]비 오는 날 나는 비트차를 끓인다 / 서성자 |
| 2023년 12월 17일(일) 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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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집착처럼 비는 창을 때리지만
여전히 하늘은 멀고 사람들은 태연하다
생명의 뒤안길은 격렬하고도 흔쾌한 법
내 중심에 돌연히 소름 한 줌 쏟아놓고
마지막 생의 에너지로
춤추는 붉은 빗물
(시조집 ‘사사로움의 주기’, 책만드는집, 2023)
[시의 눈]
차 농사 짓는 한 지인이 준 ‘비트차’가 아직 서랍에 있습니다. 정갈한 찻잎을 압력으로 쪄 레드빛으로 빚은 첫차라고 소개했더랬지요. 오늘 마침 겨울비가 옵니다. 추적추적이라는 말처럼 하늘은 모두를 애무하려는 듯, 땅으로 숲으로, 베란다 화분에까지 스며듭니다. 문밖을 보다 문득 차 상자를 엽니다. 비는 ‘묶어둔 관념’의 옷섶마저 풀어버릴 듯 ‘무모한 집착’을 멈추지 않을 기세이군요. 간밤 글감옥에 갇혀 갓 돋아난 별 이름조차 몰라 망연해지다 아침을 맞았네요. 흐리기만 한 이 필설을 미완의 원고로나마 젖은 하늘에 송고했지요. 아픈 골반을 이리저리 의자에 짓이기다 에라, 일어서서 다탁에 앉습니다. 유리주전자 속 춤추는 붉은 차가 불면의 아침을 물들입니다. 그래 돋아난 ‘소름’이듯 차를 넣고 그 양을 바라봅니다. 시의 뮤즈를 맞이한 것처럼 끓는 차에 멍때리기를 하지요. 마침, 뜰앞 호두나무에 마지막 열매가 툭 떨어집니다. 보글거린 빗소리가 찻물로 퐁퐁 튀어듭니다. 직박구리가 앉았던 자리는 빗방울만 알고 있겠지요. 젖은 날은 호두나무처럼, 아니 그의 열매처럼, 비를 맞듯 비틀어져 비스듬히 비트차를 마십니다. 벼르던 ‘생의 에너지’로 비틀 그 시의 힘을 얻기도 해요. 다잡고 헝클어진 시편을 추리려 하지요. 허, 나도 시집을 묶을 때인가 봐요. 서성자 시인은 경남 마산에서 나, 200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와 ‘시조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조집 ‘쓸만한 잡담’(2016)을 펴냈습니다. 그는 죽음의 저편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꽃대를 꽂고 삶에 총총 불을 밝히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