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그리고 어떤 생각 / 박노식

2024년 01월 30일(화) 19:47

박노식 시인·시인 문병란의 집 큐레이터

10년 만에 도시의 공기를 맛본다. 생존 때문이다. 순탄하던 업을 접고 오지로 흘러 들어간 것은 오직 시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돌아오는 건 궁핍. 그러나 그 현실 속에서도 필자는 네 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올해는 한 권의 시집과 또 한 권의 시화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게으름 없이 일자리를 찾으며 복숭아나무 가지치기, 교량 공사 보조, 운전면허시험장 강사, 사찰 매표소 매표원 등 시 쓰기와 생존 사이를 드나들며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왔다.

지금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나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생존을 지키고 있다. 퇴근길에는 한적한 소로에 차를 세우고 밤하늘의 별들을 실컷 쳐다본다. 그러면 속박된 일 속에서의 조급함과 답답함과 긴장감이 한순간에 확 풀려버린다. 별을 바라보는 것도 중독이다. 하지만 이만한 아름다운 중독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시 「저녁에」는 김광섭(1905-1977)의 작품인데 1980년대에 남성 듀엣 유심초가 작곡하고 부르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이 제목은 실은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월간중앙』 20호, 1969. 11)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 화백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가 뉴욕으로 건너가 한국에서 이름이 잊혀질 즈음 미술계를 놀라게 하는 작품 한 점을 발표하는데, 그는 이 작품으로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는다.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이 역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수화와 김광섭은 절친으로 알려져 있다. 화면 전체를 점으로 꽉 채운 일명 전면점화(全面點畵)라 불리는 이 작품을 두고 수화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필자의 생각엔 화폭의 한계 때문이었겠지만 수화의 마음 같아선 수천만 개의 흰 점들을 그 검은 화면에 꽉 찍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화폭의 점들은 전쟁과 기아의 난민일 수도 있고 생과 사의 만남일 수도 있고 돌아갈 수 없는 누군가의 고향일 수도 있고 서로의 그리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우리에게 감동과 신비로운 경험과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기도 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시를 그림으로 또는 그림을 시로 표현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들 사이에선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기성 작가들의 경우이고 만약 초등학생들이 기성 시인들의 작품을 그림으로 형상화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동구 ‘시인 문병란의 집’에서는 이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현재 진행하고 있다.

우선, 문병란(1935-2015) 시인의 시 중에서 8편을 선정하되 편당 5행 이내로 부분 발췌했다.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이미지적 시행을 고른 셈이다. 그리고 원제목은 밝히지 않고 오직 시만 제공해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총 4회 진행에 서른다섯 명의 어린이들이 참여 신청을 했고 현재 2회를 마쳤다.

결과는 흥미롭고 경이로웠다. 아이들이 시를 읽어낼 줄 안다는 것이다. 읽어낸다는 것은 행간의 의미를 추리하면서 상상하는 힘을 말한다. 그리고 계절을 잘 파악하고 이에 맞는 색채 감각이 특별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완성된 그림에 어울리는 제목을 붙이는 것인데 이 또한 원제목과 비교해서 기발했다.

시를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상상력도 놀랍지만, 자신의 그림을 통해 창의적인 제목을 창작할 줄 아는 아이들의 기특함 앞에서 어른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칼(刀, 劍)을 품을 게 아니라 별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하루하루 가슴에 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