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 숙주의 두 갈래 길 / 천세진 |
| 2024년 02월 04일(일) 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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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어는 변한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의지를 드러내주지만 인간보다 더 쉽게 변한다. 인간의 유전적, 생물학적 형질은 수만 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언어에는 수만 년 전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생각을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한다는 원초적 형질은 남아 있지만 생물학적 형태는 나무가 새가 된 것처럼 바뀌었다. 언어는 인종보다 더 다양하게 분화되었고, 지금도 변해가고 있다.
가변성을 잔뜩 품은 언어로 진실을 얘기한다거나 미래를 보여주겠다는 말을 그래서 믿지 않는다. 정치인들의 말을 혐오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들이 말하는 진실과 미래가 너무 허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언어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는다. “후세가 나를 평가하리라.”는 말을 내놓으면 소름이 끼친다.
그럼에도 인간은 언어에 의존한다. 언어도 인간에 의존한다. 서로가 의존하지만 인간과 언어는 오래 함께하는 사이가 아니다. 어느 한쪽이 먼저 떠난다. 인간은 떠나도 언어는 남고, 인간이 떠나지 않았는데도 언어가 떠나기도 한다.
198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요세프 브로드스키(1940-1996, 러시아)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W. H. Auden(1907-1973)의 「W. B. 예이츠를 추억하며」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이 시인은 언어가 존재하기 위해서 사용한 도구입니다. (중략)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것을 읽게 하는 언어는 남을 것입니다. 단지 언어가 인간보다 오래 지속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언어가 인간보다 더 잘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왜 변할까. 언어는 욕망이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욕망과 권력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무기화해야 하고, 계속해서 공격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니 언어는 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욕망은 단순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의 복잡성 만큼이나 언어는 복잡하게 변한다.
권력은 복잡성이 아니라 단순성으로 언어를 변하게 한다. 사회적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확장하지 못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의 언어에 농락당한다. 영어가 무수한 작은 언어들을 지구상에서 말살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영어 안에서조차 미국식 영어가 다른 영어들을 말살하는 날이 올 것이다.
언어가 인간의 도구라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이 언어의 도구이기도 하다. 리처드 도킨스(1941∼)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한 것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생존 기계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들이다.”언어와 인간의 관계에 대입해도 되는 말이다. 언어는 유전자만큼은 아니어도 인간을 언어를 위한 생존기계로 만든다.
더는 수렵채집으로 살아갈 수 없는 도시문명이 장악한 사회에서 인간은 뛰어난 언어의 숙주가 되어야 한다. 언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인간은 권력과 욕망의 시장에서 밀려나 도태되거나 도시를 작동시키는 보잘 것 없는 부품이 되어 소모되고 말 것이다.
언어가 변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두려운 생각이 든다. 인간이 떠나고 난 뒤에도 언어는 남는다. 떠난 이가 남긴 언어를 해석하고 판정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언어는 계속 생존할 수 있지만 언어는 글을 남긴 이가 쏟은 의도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살아남는 법이 없다.
훗날 지금의 시대가 한없이 가볍고 깊이를 잃어버린 언어들이 난무한 시대였다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가 가볍고 얕게 변한 후에 두어 세대가 흐르고 나면 의심하는 능력도 사라질 테니까. 변하지 않는 단단한 줄기와 뿌리를 가진 언어들이 이어지지 않아서 후세들은 언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러 있을 테니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언어를 남발하는 것과 자제하는 것. 침묵이 아름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