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울림’ 만든 적극행정의 힘 ●2020년 문 연 여수 ‘동행빌리지’ 전국 유일 아파트형 중증장애인거주시설 복지부 ‘시설 규정 안맞다’ 운영비 거부 전남도·여수시, 밤낮 설득·시범운영 제안 지역 주민들과 ‘한동네 이웃’ 성공 안착 지난달 장애인복지법 개정까지 이끌어내 양시원 기자

2024년 03월 12일(화) 21:37

여수시 소호동 일원. 직선 거리 750m 내에 위치한 2개 아파트 단지 4개 동 7개 세대에서는 매일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상이 펼쳐진다.

패럴림픽 정식 종목인 ‘보치아’ 선수로 매일같이 여수시장애인국민체육센터로 출근해 연습하는 A씨, 1년 넘게 클라이밍과 색소폰을 배우며 취미 가꾸기에 한창인 B씨 등 총 30명의 입주자들이 4-5명씩 모여 살며 일상을 꾸리고 있다.

여느 가정집과 다를 바 없는 이곳이 특별한 것은 입주자 모두 중증장애인이라는 점이다. 전국에서 유일한 아파트형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동행빌리지’ 이야기다.

동행빌리지 입주자들은 모두 중증장애인 시설인 여수 동백원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평생 살아온 시설에서 벗어나 도심 아파트로 온 이유는 뭘까. 김도요 동행빌리지 원장은 “지역사회와 밀착돼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누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김 원장은 장애인 시설 정원 축소 정책으로 당시 정원 80명이었던 여수 동백원을 소규모화하는 과정에서 동행빌리지를 조성했다. 이사는 불가피했지만 선택지는 부족했다. 장애인 주거시설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님비’(NIMBY) 현상 때문이다. 신규 조성에는 주민 반대가, 도심 원룸·주택 구매에는 인프라와 예산이 부족했다. 현실적인 대안은 결국 가장 흔한 주거 유형인 ‘아파트’ 뿐이었다.

정상 운영까지 우여곡절도 끊이지 않았다.

보건복지부는 2018년 장애인 거주시설 기능 보강 사업을 통해 12억4천여만원을 들여 아파트를 매입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파트 내 시설 조성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복지부 담당자가 바뀌면서 인건비·관리비 등 운영비 예산 집행을 거부했다. 식당·치료실 등이 시설 내부에 없어 관련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당시 광주·부산·대구 등 각지에 아파트형 장애인거주시설이 운영되고 있었다. 다른 점은 타 지역 시설에는 주로 경증장애인이, 동행빌리지엔 중증장애인이 거주한다는 것 뿐이었다.

결국 전남도와 여수시가 발벗고 나섰다. 여수시는 국가 보조금이 지원되기 전 시 예산이라도 지원하겠다며 시범 운영을 제안했고, 전남도는 밤낮으로 보건복지부에 연락해 설득에 나섰다. 행정 편의가 아닌 장애인 개개인의 삶을 최우선시했다.

이 같은 ‘적극행정’의 결과물로 2019년 말 처음으로 운영비 예산 4억6천만원이 집행됐다. 2020년 1월 첫 입주자 8명이 2개 홈에 입주했고, 예산이 확충되면서 2021년 7월 정원 30명을 채웠다.

입주자 모집부터 실제 입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평생을 시설에서만 살아온 입주자들에게 ‘아파트’는 살아본 적 없는 생소한 곳이었다. 끊임없이 부닥칠 ‘세상의 편견’도 두려웠다.

아파트 구매 후 다른 입주민들로부터 ‘이곳은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 사는 곳이다’, ‘여자 장애인만 들어와라’ 등 항의도 잇따랐다. 그럼에도 동행빌리지는 주민 설명회를 개최해 설득에 나서는 등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와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이어간 결과 주민들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현재 지적장애 19명, 지체장애 6명, 뇌병변 장애 5명이 동백원을 떠나 동행빌리지에 둥지를 틀었다. 2인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이 18명, 1인실 사용자는 12명이다.

동행빌리지의 최종 목적은 입주자 개개인이 ‘지역사회’에서 ‘지역민’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원 종사자가 1대1 논의를 통해 취미, 학교, 직장, 신앙 등 삶 전반에서 지역사회 자원을 누리며 비장애인과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개별 맞춤형 서비스를 입주자에게 지원한다.

유의미한 변화도 잇따랐다. 시설에 거주할 때만 하더라도 개인물품 정리, 설거지 등에 신경쓰지 않았던 입주자들이 동행빌리지에 거주한 뒤 솔선수범해 빨래를 개고, 청소를 하는 등 주체적으로 변한 것이다.

평생을 시설에서만 생활했던 A씨는 독립을 꿈꾸고 있다. 그는 최근 LH 임대주택에 청약을 넣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선발될 경우 동행빌리지 1호 독립 사례로 기록된다.

무엇보다 동행빌리지의 성공 사례가 발판이 돼 아파트형 장애인 거주시설을 확충할 수 있는 기틀도 마련됐다. 지난 2월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이 개정돼 장애인 거주시설에 ‘독립형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이 새롭게 들어간 것이다. 그동안 명문화되지 않아 지자체별로 설립에 난관을 겪었던 관련 시설을 더 늘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현재 동행빌리지에는 시설 운영 노하우 벤치마킹을 위해 전국 각지 장애인시설에서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김도요 동행빌리지 원장은 “동행빌리지는 시설에서 살 수 밖에 없는, 혹은 시설에서 살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주체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곳”이라며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기를 꿈꾼다”고 강조했다.
이상심 전남도 보건복지국장은 “장애인이 지역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장애인 인식 개선과 사회적 환경의 장벽을 없애는 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양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