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빈 석작 / 수필 - 오경심 |
| 2024년 03월 18일(월) 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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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떡집도 많고 떡의 종류도 많아서 언제 어디서나 골라서 사 먹을 수 있는 기호품이 되었지만, 사십여 년 전만 해도 명절이나 행사 때가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다. 설 대목이 되면 며칠 전부터 방앗간 앞에서 길게 줄을 서고 집집마다 멥쌀로는 흰떡과 떡국대를 빼고, 찹쌀로는 콩떡과 쑥떡을 했기 때문에 방앗간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밤을 새워야 떡을 해서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러한 명절 준비는 당연히 며느리인 내 차지였다.
친정어머니는 학교만 다니다 바로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해서 집을 떠나버린 딸이 몹시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하다가 막상 가르칠 기회도 없이 시집을 보내버린 딸이 보고 싶을 때면 가끔 떡을 해서 가지고 올라오셨다. 엄격했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시댁 식구들 앞에서 나를 대 놓고 칭찬을 하거나 자랄 때의 조신함을 자랑해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명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식구가 많았던 우리 집에 떡을 해서 이고, 들고 왔다가 바쁘게 돌아가곤 했다. 당신도 제사가 많은 집의 종부 아닌가. 어머니의 바쁜 생활을 알고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해 설 대목이었다. 어머니가 떡을 가져다 놓고 바로 가셨다는 소식을 함께 살던 동서가 전했다. 우리도 명절 준비를 많이 하는데 떡이라도 해서 내 일손을 덜어주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뭉클하게 전해지면서 가슴이 울컥했다. 떡만 내려놓고 바로 가셨다는데 버스나 제대로 타셨을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퇴근 시간을 조금 서둘러 대인동에 있는 시외버스 공용정류장으로 갔다. 시골 어른이 복잡한 도시의 정류장을 찾아 오고 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명절 대목에 무거운 짐을 들고 왔다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가셨는지, 아니면 길을 헤매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을 하며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헛걸음일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그림자라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 디딜 틈도 없는 정류장에서 석작을 머리에 이고 사람들 속에서 흔들리는 어머니의 낭자머리가 보였다. 아수라장 속을 비집고 사람들 속에서 이리저리 밀리고 있는 어머니 곁으로 갔다. 어머니 머리 위에 올려진 석작을 두 손으로 내리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가벼운 빈 석작. 우리 집에도 분명 싸드릴 만한 과일도 있었는데 아마도 어머니가 한사코 털고 나오셨겠지만, 빈 석작을 들고 보니 서러웠다. 그때는 아들 가진 집과 딸 가진 쪽의 입장이 왜 그렇게 달랐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울었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첫 명절을 맞자 어머니가 몹시 그리워졌다. 일생을 오로지 딸 하나를 위해 당신을 모두 주고 빈손으로 떠나간 어머니, 어머니와의 인연이 이렇게 억울하고 허망하게 끝날 줄은 몰랐다. 세상에 널려있는 좋은 말들 중에서 그 어떤 말도 나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먼, 먼 후일이라도 어머니와 내가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은 더 막연하다. 삶도 죽음도 뜬구름 같이만 느껴질 뿐이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 찰나에 불과했던 당신과 나의 인연. 그 소중한 시간을 송두리째 주기만 하고 가신 어머니.
해마다 봄은 다시 찾아오고 꽃은 또 피어서 우리를 맞아준다.
어머니를 뵈러 집이 아닌 산소로 갔다. 어머니 이름이 새겨진 묘비만이 나를 맞는다. 다정한 그 모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어머니와의 시간들이 가슴을 적신다. 내가 살아온 힘이 바로 어머니였음을 늦게나마 깨닫고, 우리 가족들이 만든 송편을 어머니 영전에 올렸다.
<오경심 약력>
▲교육대학원 석사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2001)
▲광주문인협회 이사, 곡성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 ‘눌러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