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풀잎의 그림자 / 박정이

2024년 04월 14일(일) 19:42

선릉의 안쪽 담벼락에
사월의 그림자를 그리려다
풀잎 알갱이에 색을 그리고
봄의 손톱 끄트머리에 풀잎 색을 칠한다
구부렸다 서서
구부렸다 앉아서
온종일 풀잎 그림자를 그린다
작은 샘물에 그리움을 풀어놓고
압축해온 봄의 흐린 눈빛도
익숙해진 풀잎의 시간으로 풀어놓는다
(시집 ‘목성의 춤’, 포에트리, 2024)

[시의 눈]

안채 뒤 담벽 아래에 텃밭이 있습니다. 풀잎이 벽에다 그림자놀이를 합니다. 햇빛 밝은 사월의 오후이지요. 한 엄마가 김을 맵니다. 참 따라온 아이도 있군요. 아이는 눈이 부신 듯 찡그리고 담벽의 풀잎 그림자를 쳐다봅니다. 흔들리는 풀잎은 그를 달래줄 모빌처럼도 보이네요. 아이는 구부렸다가 쪼그려 앉았다가 결국 서서 움직이는 그림자로 다가갑니다. 색칠이라도 하려는 듯 앙징한 손을 들고 가까이 뒤뚱거립니다. 한데 그림자 모빌은 이리저리 피하는군요. 발아래 개미 한 마리 기어갑니다. 그림자를 따라 작은 조각을 제집으로 옮기고 있네요. 아이는 그림자를 보랴, 개미를 보랴, 바쁜 요깃거리에 빠집니다. 봄바람이 그림자와 아이와 개미를 놀리는듯 합니다. 이때 엄마와 눈이 마주칩니다. 풀잎 그림자에 다가가는 아이 따라 호미를 더 바삐 놀리지요. 하면 그림자에도 색칠해야겠지요. 엄마는 풀물 든 손을 얼른 담벽에 쓱쓱 문지릅니다. 기다렸다는 듯 푸른 그림풀이 돋습니다. 박정이 시인은 서울에서 나 2009년 경남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시집 ‘오후가 증발한다’(2012), ‘여왕의 거울’(2017) 등을 냈고, 포에트리 시담포엠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생명체가 타자를 먹고 자신의 생장을 도모하다 다시 타자에게 내어주는 그 생의 공진화를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