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불문율 / 한혜영
2024년 04월 28일(일) 19:52
비가 오는 까닭을 따져 묻지 않는 것처럼 지천으로 널린 햇볕도 그러려니 하는 것처럼

슬픔이 내게로 오면 묻지 않고 젖을 거다

안개에게 먹혀도 투정이 없는 달처럼 고양이 푸른 눈에 떠도는 전설처럼

슬픔이 기억으로 오면 섬처럼 잠길 거다

(시조집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가히·문학의전당, 2024)

[시의 눈]

몇 해 전에 난 당신과 헤어졌지요. 주변에 알릴 틈도 없었던 이별에 내 슬픔만 두고 떠난 당신을 먼 나라 국경까지 배웅했습니다. 숲속 흐름처럼 눈물은 조용했으나 새벽을 긷던 샘처럼 가슴은 한없이 깊어졌습니다. 햇발이 갈기로 쏟아지는 언덕에 당신을 두고 총총 내려왔지요. 그후 내 일상엔 지천의 햇볕이, 아니 바늘끝처럼 추운 자상(刺傷)의 비가 뚫듯이 스며들었어요. ‘그러려니’ 하는 세월을 믿을 뿐, ‘나’라는 사회에 소속된 내 존재를 특별한 성문법으로 규정하지 않을, 그러니까 허, 운명의 룰에 따르기로 한 거지요. 그렇더라도, 지금 그대 잃음이 속저리게 밀려옵니다. 나 홀로 입국하길 바라는 당신의 나라엔 ‘안개’조차 어둡습니다. 고양이 눈에 푸르게 ‘떠도는 전설’일까요. 뒤집어 지지 않을 봄의 나이테가 또 그려지고 있군요. 당신이 새삼 내려와 내 눈시울을 탐할 때 무인도나 오륙도처럼 잠깐 잠겼다 솟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고 묻지 말기를요. 내 안에 당신이 부린 그 ‘불문율’의 짐이니까요. 한혜영 시인은 충남 서산에서 나 1989년 ‘아동문학연구’ 동시조 당선, 1994년 ‘현대시학’ 시 당선,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2002), ‘올랜도 간다’(2013), 동시집 ‘치과로 간 빨래집게’(2024) 등이 있습니다. 그는 대상을 묘사하되 뜸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 그 고투(苦鬪) 과정을 처연히 걸러내는 시인으로, 현재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노창수·시인>
이 기사는 광주매일신문 홈페이지(kjdaily.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kjdaily.com/1714301536628489006
프린트 시간 : 2024년 07월 15일 10:5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