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측은지심(惻隱之心)도 없이, 어찌 / 박노식 |
| 2024년 04월 29일(월)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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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창작을 볼모로 삼아 태악산 아래 터를 잡고 시 쓰기에 매진한 지 10년이 흘러가고 있다. 다섯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시화집이 출간되는 동안 이곳을 찾아오는 이는 손꼽아 이름을 외울 만큼 극소수다. 그러나 찾아와도 적막강산 같은 환경 속에서 자기 내면의 그 무엇인가를 떨쳐내지 못하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건대 도시인들의 공통점은 고요와 적막의 세계를 몹시 못 견뎌 한다는 것을 여기에 살면서 알게 됐다. 내려놓지 못한다는 것, 빈 것을 참아낼 수 없다는 것, 혼자라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초조, 달리 말하면 내 마음과 대화할 만한 내면의 창을 갖고 있지 못한 점이 도시인들의 특징 같기만 하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만의 세계에서도 필자의 벗은 오히려 넘쳐 난다. 새는 말할 것도 없고 개미, 거미, 풀벌레, 나비, 개구리, 잠자리 등, 창문을 열고 올려다보는 흰 구름은 아주 몽환적이어서 시상을 제법 여러 번 가져다주기도 했다.
어느 늦봄 무렵이었다. 이레 만에 대처에서 돌아와 볕을 쬐려고 마당가에 서 있는데 고양이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탁자 아래에서 곤히 쉬고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움직임이 없어서 큰 소리로 불러보았으나 여전히 그대로였다. 다가가서 보니 이미 죽은 채 구더기만 들끓고 있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 녀석의 주인은 본디 산 아래 맨 위 하얀 이층집, 부잣집이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 집을 떠나 홀아비에게 와버린 것이다. 처지가 비슷해서 서로 나눠 먹기도 하고 때론 변변치 않은 살림에 걱정도 되었지만, 보름 후엔 불현듯 새끼 세 마리를 데리고 나타나더니 앙탈 부리듯 끼니를 내어달라는 것이어서 어이없어하다가 곧 굴복하고 말았다. 이리 살갑게 지내다가 한 달 후, 생존을 위해 대처에 나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 지경을 맞이한 것이다.
아무래도 짠하고 애달파서 땅을 파고 그를 뉘고 그 위에 꽃잎을 따다 뿌리고 봉분을 만들면서 그를 달래주었다. 놀라운 것은 새끼 세 마리가 울타리 끝에 모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게 어미의 사후에 대한 예측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생을 보내고 장차 후손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라.” 생각해 보니 어미가 그 부잣집을 떠나 굳이 이곳으로 온 것은 그 측은지심을 필자에게서 발견해버린 듯해서 마음이 많이 아파버렸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는 가장 선하고 아름다우며 소중한 내면이다. 시인 백석(1912-1996)의 시 「수라(修羅)」를 읽다 보면 그게 보인다.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찌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어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사슴』,1936)
가족 잃은 새끼 거미 한 마리를 보고도 이처럼 ‘가슴이 찌릿하고, 메이는 듯하고, 그래서 나를 서럽게 하고, 나아가 슬퍼지는 것’인데, 이런 측은지심도 없이 오직 구호만으로 표를 구했으니 서러움 많은 민심이 어찌 움직이기나 했겠나. 멍청이들아, 문제는 진정한 측은지심이야. 너희에겐 그게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