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파 한 뿌리 / 이계양 |
| 2024년 05월 12일(일) 1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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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대파 대첩을 보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권에 나오는 ‘양파 한 뿌리’가 떠올랐다. ‘대파 한 단, 대파 한 뿌리’라는 말에서 ‘양파 한 뿌리’가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었던 것이다.
옛날에 참 못된 한 노파가 살다가 죽었다. 죽은 후 살펴보니 노파는 사는 동안 착한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악마들이 그녀를 지옥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노파의 수호천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님께 그녀를 변호할 궁리를 한다. 그러다 다행히 양파 한 뿌리를 기억해 내고는 하나님께 사정한다. “하느님, 저 할머니는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에게 준 적이 있답니다.” 이 말을 들은 하느님은 “양파를 갖고 가서 그가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도록 하여라. 만약 지옥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지면 지옥에 남게 되리라”고 하였다. 천사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양파를 노파에게 내밀었다. 노파는 그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때 지옥의 다른 사람들이 그 양파를 같이 잡고 오르려고 발버둥하며 매달렸다. 노파는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란 말이야” 하면서 발로 걷어차 버렸다. 노파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양파가 뚝 끊어져 곧장 할머니는 지옥 속으로 떨어져 버렸고 수호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맥락이 같다.
우선 노파는 생전에 착한 일을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소통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생 딱 한 번 거지에게 양파 한 뿌리 준 것이 ‘준 것’의 전부요 유일한 것임을 보면 알 수 있다. 행간에서 읽히는 바로는 거지에게 준 양파 한 뿌리도 연민과 관심에서라기보단 무심한 상태에서 생명력 없는 형식적인 행위일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노파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을 외면하며 단절의 삶을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의 ‘내가 시장을 많이 봐 봐서 아는데’에서 ‘정말 시장을 많이 봐 봤을까’를 의심하게 된다. 많이 가 봐서 제대로 잘 알고 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대파 한 단에 875원이 합리적인 가격이라니. 백성들이 알고 있는 실상과 너무 딴판인 단절된 민생 점검에 화난 민심이 선거 결과로까지 이어진 것이 아닐까.
또 노파는 수호천사의 연민의 마음에 따라 지옥이라는 단절과 불통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옮겨갈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노파는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구”하면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매몰차게 발로 걷어차 버린다. 그 ‘내 것’에 매달려 다른 사람들을 떨쳐내는 행위야말로 스스로를 고립 단절시키는 일이고 결국 나도, 너희들도 모두 지옥에 내쳐지게 만들고 만다. 이는 살아서 양파 한 뿌리 건넨 것이 전부였던 노파가 죽어서도 양파 한 뿌리를 독차지하려는 행위를 통해 지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총선에 출마한 어느 후보가 대통령을 변호한답시고 그것은 대파 한 단 값이 아니라 한 뿌리 값이라고 해 실소를 짓게 한 것과 같다. 내 것(편) 변호에 매달려 너희들(의 인식)을 내쳐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총선 패배라는 징벌에 고립 매몰된 것이다.
양파 한 뿌리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느냐, 공동체의 이방인으로 단절되느냐를 가름하는 가늠자다. 살아서 공동체 구성원 누군가에게 영혼 없이 건넨 양파 한 뿌리가 지옥에서 벗어날 구원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또 양파 한 뿌리에 매달려 같이 살자는 공동체원들을 매몰차게 걷어차는 일을 통해 영원히 나락에 떨어져 고립을 자초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음을 보게 된다.
‘고(孤)’는 넝쿨에 매달린 오이의 모양으로 홀로 남겨진 자식을 뜻하는 글자다. 오이 넝쿨에는 수많은 오이가 달려있다. 홀로 달려있어 보이지만 오이들은 한 넝쿨에 다 연결돼 있다. 마치 양파 한 뿌리에 공동체의 천국과 지옥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