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운의 캔버스산책]밤에 우는 새

2024년 05월 13일(월) 17:09

‘5월 단상’ <작가 소장품>

K 선배를 만나러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부근 화실에 갔던 것이 벌써 30년이 넘었나 보다. 담배 한 보루와 막걸리를 사 들고 물어물어 찾아갔었다. 우사를 개조한 작업장에서 밤새 들었던 새소리가 부메랑 돼 다시 메아리친다. 지리산의 아우라 때문일까? 절필한 선배의 안타까움 때문일까!

내 작업실 책꽂이엔 깨진 보도블록 위에 대검이 그려진 선배의 작품이 있다.

인간에 대한 상식이 깨어지며 역사가 되는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원작만이 보여주는 아우라가 있다. 보도블록이란 물성에 그려진 칼의 흔적을 보며 그 시절을 상상해 보는 시간은 굉장한 정신의 고양을 일으킨다. 덕분에 선배가 그림을 그렸던 시점과 내가 그 그림을 바라보는 시점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줄어든다.

한 작가가 인간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관념이 아닌 가슴으로, 커다란 의미로 느낄 기회는 많지 않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진실을 갈망하는 의지의 서사화가 현실로 소환된다.

내가 좋아했고 감동한 그림은 실제로 이곳에서 작업했던 그가 다양한 색을 가진 흙을 채집해서 나이프와 흙손으로 그려 낸 단단한 진심이었다.

부지런히 따라 걸어야만 만날 수 있었던 감수성이 예민했던 선배의 예술정신과 ‘작가 태도’에 대한 공감이 지금 나를 있게 했다.

노고단 반야봉 짙은 안개가 낀 밤에 들었던 소리는 지금도 귓전에 남아 있다. 밤에 우는 새와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자, 그 둘을 동시에 바라보자.

지리산과 어둠, 새와 선배 사이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는 온 천지 생명들이 갖고 있는 기운들의 총화로, 비밀스러운 회화 의식과 같은 힘이 있다. 그 속에 있던 나 역시 기류를 따라 밀려가고 밀려오는 안개에 어느새 묻히고 말았다. 다시 생(生)의 존재로부터 상처를 베어 물자, 그리고 그 의식으로 메워보자. 이 봄, 내가 넘어가야 할 큰 고갯길이다.

<대인동에서 화가 강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