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양심’에 대하여 / 임종영

2024년 05월 15일(수) 19:36

임종영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연구실장

지난해 어느 날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관장님으로부터 “영상이 다소 길지만 꼭 끝까지 감상해보라”는 메시지와 함께 카톡 영상 하나를 받았다. 영상을 확인해보니 최재천 교수의 2023년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였다. 영상을 한참 보고 있노라니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서울대 졸업생으로서 혼자만 잘 살지 말고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끌어 주십시오.”, “치졸한 공평이 아니라 고결한 공정을 추구해야 한다.”라는 등 귀담아 들을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영상을 감상한 후 유독 가슴 깊이 내게 남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양심’이었다.

최재천 교수 역시 학자로서 연구와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하면서도, 왜 온갖 다양한 사회적 부름에 종종 자신의 목까지 내걸고 참여 했을까?라고 자문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양심’을 들었다. “저는 왜 이 모든 걸 다 하느라 애쓰고 살았을까요? 저는 사실 태생적으로 비겁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양심’ 입니다. 저는 우선 숨었습니다. 솔직히 다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놈의 얼어 죽을 양심 때문에 결국 나서고 말았습니다”라고 고백했고, “제 마음 깊숙한 곳에 아주 작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촛불 같은 그놈의 양심을 어쩌지 못해 늘 결국 일어서고 말았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 후배님들에게 제 마음 속에 타고 있는 작은 양심의 촛불을 하나씩 나눠드리려 이 자리에 섰습니다”라고 축사를 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글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 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됐다고 느꼈습니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체제였던 197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씨알의 소리’ 창간 5주년 기념 시국강연회에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라면서 “생각하는 국민, 행동하는 국민이어야만이 살 수 있다. 국민으로서 무엇인가 행동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머지않아서 우리 민주주의가 회복된다는 것을(중략) 그것은 틀림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보증하겠다”고 외쳤다. 50여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들의 행동하는 양심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그랬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살상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피 흘리는 시민을 부축해 병원으로 옮겼고, 헌혈을 위한 긴 행렬에 동참했으며, 27일 새벽 중무장한 계엄군의 진압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도청을 떠나지 않았다. 피 흘리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도, 헌혈을 호소하는 차량의 안내방송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도, 도청에 함께했던 사람들을 남겨두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알면서도 함께하지 못해 지금까지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마저도 광주 시민이면 누구나 마음 한켠에 ‘양심’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5·18민주화운동 제44주년을 맞아 광주시민의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양심의 촛불’이 전 세계인에게 하나씩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