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숲의 연가 / 수필 - 김정자 |
| 2024년 05월 27일(월) 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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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여고 동기동창인 O 작가가 손을 끌어 앞자리에 앉고 보니 마음이 고향이다. 나와 O 작가는 여고에 다닐 땐 같은 반인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걸어온 행로 또한 서로 달랐다. 오랜 세월 동안 각자 다른 인생길에서 부딪치고 깨어지며 다듬어진 우리를 세월은 편안하게 나란히 앉혀주었다. 우리의 대화는 젊은 날의 키 재기를 뛰어넘었고 하늘에 오르는 풍선처럼 잔뜩 부풀었던 야망도 평정을 찾은 뒤였다. 고교 시절의 이야기나 친구 이야기 그 어떤 얘기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니 우리는 익어도 충분히 잘 익은 사과 같았다. 한입 베어 물면 상큼한 향과 맛이 오감을 웃게 하듯이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익어갔다.
“차창 밖의 먼 산이 참으로 아름답다. 어쩜 새순으로 돋아난 나뭇잎의 색이 저리 고울까? 연두는 연두로되 갖가지 다른 톤으로 어우러진 풍광이 대단하지 아니하냐?”
“야 아~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면 인생이 다 되어간다는 뜻이지.”
“그래? 하지만 아름답기는 하네. 아름다운 색들의 조화를 봐. 나무들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각양각색의 모습이 부드러운 솜사탕 같지 않냐?”
“나무는 나무의 일을 하지!”
“맞아,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모두 자기 일을 하지.”
“맞아.”
그리고 그녀와 나의 대화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오랫동안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그녀로선 지금 시 한 수가 싹트는 건 아닌지.
나무들은 이내 쏟아질 듯 소나무의 송홧가루, 아카시아 꽃숭어리, 벚꽃, 배꽃 등속이 어우러진 꽃동산으로 우리에게 탄성을 연발하게 하리니 그 또한 종족 보존을 위한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무는 어떤 형편이라도 환경을 탓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살아간다. 망개나무가 구불구불하게 자람은 큰 나무들에 가리어져 이리저리 햇빛을 찾다 보니 그리되었을 것이다. 칡넝쿨이 다른 나무들을 칭칭 감아 오르는 것도 결국은 가장 낮은 데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필살기가 아닐까. 나무는 자신의 처지를 감지한 후에는 어떤 경우에도 삶이나 꽃을 피우기 위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이를 위해 온갖 지혜와 노력을 기울인다. 큰 나무의 우쭐거림에서 지혜를 얻고 작은 나무의 열등한 환경에서도 살길을 개척하는 나무는 오직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아무리 싹틔우기가 불편한 자갈밭이나 큰 바위틈새라도 최소한의 조건만 되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는 풀포기나 이끼들도 흔들어 대는 바람에 바짝 엎드리어 바위를 껴안고 안절부절 생을 지탱한다. 심지어는 나무의 밑동이 댕강 잘려 나간 형편이라도 나무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른 나무들과 같이 연두를 올려 싹을 내고 줄기를 뽑아 올린다. 어떤 경우도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다른 곳으로 스스로 이사 할 수 없는 것이 나무의 숙명인지라 오로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어우러져 숲이 되고 산이 된다.
이것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본능이요 어떤 환경에서도 자식을 최우선으로 길러내는 어미의 마음이기도 하다. 어쩜 삶은 즐기는 것이며 홀로 평안하면 된다고 쉽게만 생각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삶, 어떤 경우도 후대를 위한 꽃을 포기하지 않는 질긴 소망이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 세상사가 아닐까?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본분이 아닐까? 삶을 버거워하는 우리를 다독이며 나무 선생이 삶의 시범을 보여준다.
나무가 어찌 혼자 힘으로 그리할 수 있으랴? 그 본능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를 만드시고 주관하신 절대자의 숨은 섭리가 오묘하기만 하다.
먼 산을 바라보는 찻잔이 아기 햇살과 깔깔거린다. 에메랄드빛 하늘이 참으로 곱다.
<김정자 약력>
▲수필가
▲광주문인협회 회원
▲전 운암중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