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아트씬, 새로운 도약을 꿈꾸다]이조흠 작가 뒤틀린 이면에 담긴 기호의 향연…‘우리 시대의 얼굴’ ‘솔직함’ 다루는 예술 매력…키치·팝아트적 요소로 친근함 더해 아날로그·디지털 경계에 선 ‘플로터 소묘’, ‘바니타스’ 작업 흥미 “글로벌 환경에 맞는 공통언어로 다양한 관객과 소통 이어갈 것” 글·사진=최명진 기자

2024년 05월 28일(화) 20:01

양림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조흠 작가. 솔직함에서 출발하는 그의 작업은 자신의 삶과 주위, 한국 그리고 세계 등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고 있다.

이조흠 작가의 작업세계는 음악, 그중에서도 힙합과 많이 닮아있다. 음악에서 반복되는 ‘루프’가 힙합의 기본 요소인 것처럼 그의 작품 또한 작은 단위를 모으고 반복하며 새로운 변주를 이어나간다.

작가의 그림은 솔직함에서 출발한다. 예술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반영해야 한다는 가치관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담아낸 회화부터 세모·네모·동그라미로 이뤄진 얼굴 이미지 작업, 이모지를 출력해 작업하는 플로터 소묘까지. 지금껏 펼쳐낸 일련의 작업들은 가상이지만 무엇보다 현실과 맞닿아있다.


“솔직함에서 오는 쾌감과 강렬한 힘이 예술에서도 항상 보여지길 바라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작품에 담아내고, 또 내 방식대로 풀어나가면서 작품세계가 완성되는 건 굉장히 멋진 일인 것 같아요.”


지난 15일 양림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조흠 작가는 자신의 작품관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친근한 만화 캐릭터를 소재로 한 작품 ‘untitled(in the club)’. 키치하고 팝아트적인 요소로 읽히지만 그 바탕에는 현대사회에 대한 냉철한 시선이 담겨있다.

확실히 그의 작품은 겉보기엔 키치하고 팝아트적인 요소로 읽힌다. 둘리나 짱구, 토토로 등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만화 캐릭터나 이모지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다. 하지만 작업의 바탕에는 현대사회에 대한 냉철한 시선이 전제돼 있다.


“키치(kitsch)가 현대미술에서 인정받게 된 건 사실 깊은 아이러니를 담고 있어서였잖아요. 저는 분명히 그 맥락에 속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삶을 살다 보면 양립할 수 없지만, 함께 하는 것들이 있는데 저는 그 지점을 다루고 싶어요.”

플로터 작업실에서의 이조흠 작가. ‘플로터’는 x축과 y축으로 움직이는 기계로, 작가는 이를 활용한 소묘 작품을 발전시켜오고 있다.

작업실 벽에 걸린 그의 최근작들을 볼 수 있었다. x축, y축으로 움직이는 ‘플로터 머신’을 통해 작가의 손을 거친 수많은 선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시트지를 자르거나 도면을 그리는 용도로 사용되는 기계를 작업과 접목했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샘플링’(sampling)이라 이름 붙였다.

‘플로터 머신’이 작동되며 아이폰 자판 속 기본 이모지를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플로터 소묘’는 작가의 손을 거친 수많은 선들이 디지털로 복제돼 나오는 결과물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모두를 아우르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미술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전통적인 ‘소묘’를 조금 뒤틀어보자 생각했죠. 결국 제 손으로 그린 작품이 디지털로 복제된 결과물로 나오게 되는 거예요. 선을 하나하나 따라 그린다는 점에서 프린터 출력물보다 훨씬 더 제 그림과 유사해요.”

아이폰 속 이모지를 활용한 플로터 소묘 작품 ‘msg #001’

만국 공통언어인 아이폰 속 ‘이모지’에서 시작된 그의 ‘플로터 소묘’ 작업은 최근 정물화로 옮겨왔다. 실제로 본 적 없지만 분명히 있고, 존재하지만 곁엔 없는 여러 정물화를 한 테이블 위에 놓은 ‘온 더 테이블’(On the table) 시리즈다.


“인터넷 세상에선 원본, 그리고 원본이 지닌 아우라를 쉽게 찾을 수 없어요. 결국, 오리지널을 원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진짜를 찾아 헤매는데, 여기서 오는 물질적인 괴리를 다뤄보고 싶었어요. 이는 어떤 게 원본이고 복제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플로터 소묘’ 작업은 최근 해골 등 오브제와 이모지가 함께 배치된 ‘바니타스’ 정물화로 확장되고 있다. 사진은 작품 ‘on the table #002’.

작품 명제와 같이 테이블 위에는 여러 오브제가 놓여 있다. 모래시계나 해골 등을 오브제로 한 ‘바니타스’ 정물화다. 그 옆에는 이모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이질적이면서도 어떤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죽음, 허망함을 상징하는 그림처럼 현대사회의 인터넷 문화도 이와 유사하다는 게 작가의 이야기다.


“인터넷 문화란 게 엄청 소비적이잖아요. 하루에도 몇백 장 이상의 이미지를 별생각 없이 보고 날려버리는 그런 일이요. 하나의 테이블 위 실재하는 것, 그렇지 않은 걸 동시에 뒀어요. 책상 위 무언가를 올려놓는 행위는 물리적인 건데, 전 이게 무한한 테이블이길 바라요. 뭐든지 올려놓을 수 있는 인터넷처럼요. 수많은 오브제가 연이어 펼쳐지는 장면을 통해 끝이 어딘지 모르게 만들고 싶어요.”


이날 작업실에서는 ‘샘플링’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컴퓨터로 소묘를 한 그림은 데이터로 저장돼 플로터 머신으로 옮겨갔다. 펜을 매단 기계는 가로, 세로로 움직이며 작가가 그린 선을 따라 그으며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냈다. 작가의 손길이 묻어있지만, 소묘이면서 복제인 그의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오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수많은 선을 긋기에 종이의 내구성이나 펜의 종류도 섬세하게 살펴봐야 하는 작업이다. 그러면서도 선을 더 채우거나 지우는 등 빠른 수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반 소묘와는 다른 매력을 갖는다. 손쉽게 크기를 키우거나 이미지를 겹치고 떼내고, 뒤집을 수 있는 건 디지털 작업의 장점이기도 하다.


“제가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에 어떻게 보면 가장 완벽한 원본에 가까운 거죠. ‘통제할 수 있는 소묘’라는 점에서 이 작업에 더욱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더 많은 장치를 사용해서 제 관념을 조금 더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양림동에서 나고 자라 미술대 졸업과 동시에 데뷔해 15년째 작품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그는 광주 토박이답게 지역 문화계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전 광주가 작업하기 정말 좋은 환경이라 생각해요. 수많은 문화기관과 공간들도 곳곳에 많아요. 다양한 레지던시에 참여한 경험은 제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뒷받침이 됐어요. 다만 미술을 향유하는 일반인이 적다는 건 아쉬운 부분이에요. 미술시장이 넓지 않다 보니 관객 선호도가 비교적 편협할 수밖에 없고요. 보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관객들이 있는 곳에서 작가들의 활동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한 담론의 장이 마련된다면 더욱 건강한 미술 생태계가 조성되지 않을까요.”


지난해 광주롯데갤러리 초대전 기간 참여한 캐나다 토론토 리치몬드 401에서의 프로젝트는 작업의 확장, 그리고 지역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작은 사이즈의 플로터 소묘 12장을 동일하게 두 세트 제작해 하나는 캐나다, 다른 하나는 광주 기획자에 전달했다. 액자는 물론 작품 배치 방식이나 구도 등을 오롯이 두 기획자에 맡긴 것이다.


“각 문화공간, 전시 특성에 맞춰 작품이 걸리길 바랐어요. 토론토 현장에 가진 못했지만 온라인으로 화상회의를 하면서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재밌었어요. 작품 이미지도 언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통하는 ‘이모지’였고요. 대작은 아니었지만 글로벌 환경에 맞는 캐주얼한 작품들로 다양한 관객들과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경험이었어요.”


내 삶과 주위, 한국 그리고 세계 등 작금의 현대사회를 돌아보는 것. 그의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메세지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글·사진=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