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성 사회로 가는 길 / 천세진 |
| 2024년 06월 09일(일) 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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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프로그램과 영화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일까? 현실을 반영해 만들었다는 주장이 제대로 된 당위일까? 언제까지 그런 프로그램과 영화를 계속해서 봐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들에 대해, 잔혹한 사건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했다고 주장하겠지만 흉악 범죄를 다룬 프로그램과 영화는 현실을 전혀 바꾸지 못한다. 현실을 바꾸는 것은 법이다. 그런데 바로 법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최근 20년 전에 드러난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사건이 다시 사회적 관심사가 됐다. 2004년 경남 밀양시에서 44명의 남학생이 여자 중학생을 집단으로 성폭행한 사건인데, 기소된 10명도 소년부로 송치됐다가 보호관찰 처분을 받는 것에 그치면서 최종적으로는 44명 중 단 한 명도 형사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가해자들이 고등학생이었다는 이유였을 텐데, 오로지 가해자의 처지를 고려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피해자를 고려한 법적 결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유튜버의 가해자 추적을 통해 드러난 20년 전 밀양의 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유튜버의 사회적 고발이 사적 제재에 해당하니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이 옳지 않으려면 선결돼야 하는 것이 있다. 피해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공정한 판결과 집행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바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알바니아를 대표하는 작가 이스마엘 카다레(1936∼)는 소설 『부서진 사월』을 통해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고대로부터 전승돼 알바니아 북부 고원 지대의 전통이 된 관습법 ‘카눈’의 폐해를 보여줬다.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적 제재가 꼬리물기로 관습화됐을 때 한 사회가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를 보여준 것이 단순히 알바니아의 문화적 풍경이었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그것은 범 인류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재는 고대의 유산일 수 있지만, 한 사회의 법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한국의 법원에서 정한 형량을 살펴보면 하나의 범죄 행위에 대한 최저 형량과 최고 형량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전적으로 가해자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범죄로 인한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최저 형량과 최고 형량 사이의 차이는 클 수가 없다.
초범에게 살해당했든, 음주운전에 희생됐든, 보이스피싱과 전세 사기에 희생됐든 피해자가 당한 결과와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형량은 고무줄이다. 형량이 고무줄일수록 판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의 존재감은 커진다. 법률에 근거한 판결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같은 범죄 행위에 대한 큰 형량 차이가 법조인들의 자의적인 판단에서 기인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뉴스를 보면 악성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다. 흉악 범죄와 조직 폭력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은 법이 원인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한 처벌이 그걸 조장하고 있다. 고쳐지지 않고 고통스러운 풍경을 거울처럼 계속 응시해야 하는 사회는 악성 사회다. 한국이 바로 그런 사회다.
방법은 간단하다. 가해자들에게 범죄에 상응하는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누군가는 사회를 살풍경으로 만들 것이라고, 범죄자에게 교화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관대한 사회가 어째서 피해자는 보호하지 않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일까.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범죄자의 인권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모두 지키고 난 후에 지켜져야 한다.
국가는 누굴 지킬 것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선량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킬 것인지, 계속해서 피해자가 생겨나도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가해자들을 지킬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 의지를 법과 판결로 말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가해자를 먼저 지키려는 것 같다. 악성 사회인 증거다.